[[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 군대해산 현장에서 자결 시도

김삼웅 2021. 5. 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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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강탈하고자 한 일본에게 취약한 군사력이지만 대한제국 군대는 그나마 무장된 최후의 집단이다.

일본은 1907년 10월 군대해산을 위한 사전 조처로서 군정(軍政) 시행에 관한 내훈을 만들어 치밀하게 준비했다.

1907년 8월 1일, 이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단행되었다.

아침 7시 대한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각 부대 대대장 이상을 관저인 대관정으로 소집하여 이들에게 순종의 조칙을 전달하고 이에 복종하여 해산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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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살아서 광복운동을 하라는 운명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김삼웅 기자]

 
▲ 1907년 7월 31일자로 군대해산조칙이 내렸다. 이 와중에 한국군대는 몽땅 흩어졌으나, '근위대'의 일부만은 황실을 시위한다는 명분으로 간신히 남겨졌다. 1907년 7월 31일자로 군대해산조칙이 내렸다. 이 와중에 한국군대는 몽땅 흩어졌으나, '근위대'의 일부만은 황실을 시위한다는 명분으로 간신히 남겨졌다.
ⓒ 이순우
 
한국을 강탈하고자 한 일본에게 취약한 군사력이지만 대한제국 군대는 그나마 무장된 최후의 집단이다. 1904년 대한제국 군인은 1만 6,000명, 1907년 당시에는 4.500명의 수준이었다.

일본은 1907년 10월 군대해산을 위한 사전 조처로서 「군정(軍政) 시행에 관한 내훈」을 만들어 치밀하게 준비했다. 통감부가 설치되기 전이다. 이어서 같은 해 7월 「군대해산조칙」을 공포하고 보안법을 제정하여 모든 한국인의 무기 휴대 금지를 규정하였다.

1907년 8월 1일, 이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단행되었다. 아침 7시 대한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각 부대 대대장 이상을 관저인 대관정으로 소집하여 이들에게 순종의 조칙을 전달하고 이에 복종하여 해산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아울러 해산식에 참석하는 부대 사병들은 오전 10시까지 총기를 휴대하지 말고 훈련원에 집합할 것을 명령하였다.
  
▲ 강화진위대 시절 이동휘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동휘는 궁전진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타고난 무인이었던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903년 5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성재는 진위대장으로 대한제국의 요충지인 강화도 방위를 책임졌다. 사진 앞줄 중앙이 이동휘다. 조상석, 홍우섭, 박제언, 유홍준, 최영순, 김정배가 함께 있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하사와 병졸들을 해산시키는 훈련원 연병장에는 일본군이 착검을 하고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예정된 시각 10시가 임박하여 각 부대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12시가 지나도 연병장에 집결한 군인은 1000명도 되지 않았다. 제1차 해산 대상 군인 3441명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수준으로, 해산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규식은 국가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가 해산되는 꼴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나갔다. 제1연대 제1대대 박성환 참령(소령)이 군대해산을 거부하며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지척에서 이를 알게 된 신규식은 부하들과 함께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총으로 무장, 대한문 앞까지 진출했다. 

즉각 출동한 일본군은 월등한 무기와 병력으로 육박해 왔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일본군은 기관총을 난사해댔다. 선두에 섰던 예관은 이에 펄펄 달아오른 불덩어리였다.

"한 사람도 후퇴하지 마라!"

그러나 수 십번이고 외쳐 보았자 병사들은 밀리기 시작했고, 그가 다시 막사로 돌아왔을 땐 부하들의 얼굴 태반이 보이지 않았다.

"헛된 순국이었구나"

예관은 격앙된 감정을 누르고 하나뿐인 눈을 지긋이 감았다.

"내 존경하는 박 참령이 갔다. 내 사랑하는 부하들도 갔다. 아 나라는 엎어진 배, 내 목숨은 옛날에 없어진거나 다름없는 것, 참 구차스럽구나."

애꾸눈을 번쩍 뜬 예관은 칼을 쑥 뽑아 들었다. 옆에 섰던 부하 하나가 재빨리 칼을 빼앗았다. 예관은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졸도한 것이다. (주석 5)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일에 일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여 한국군을 향해 난사했던 숭례문
ⓒ 정만진
 
을사늑약에 이어 군대해산에 저항하여 두 번째 자결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부하에 의해 구명되었다. 모진 생명이고 운명이었다. 그래서 살아서 광복운동을 하라는 운명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1000여 명의 부대원 중에서 6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516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도 42명의 사상자를 냈다. 시위대 군인들은 화력이 훨씬 우세한 일본군과 맞싸울 수 있을 정도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병영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곳을 탈출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일본군과 시가전을 계속하면서 시외로 나온 후 다시 창의문 밖 예수교 교회당 고지 부근에 모여 남대문 정차장 일본군위소를 습격하여 큰 타격을 준 후 지방으로 이동하여 지방 의병에 가담하였다.

일제의 기록은 "해산한 군인의 대부분은 지방으로 도주하고 폭도(의병-필자)의 무리에 투(投)하여 길이 화란의 염(焰)을 종식시키지 못하는 인(因)이 되었다." (주석 6) 라고 썼다.

주석
5> 이이화, 앞의 책, 239쪽.
6> 조선주차군사령부,『조선폭도토벌지』,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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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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