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친구 현우를 보내며

2021. 5. 15.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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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민 사회부 기자


“다 끝나면 서로 안아주는 게 좋겠지? 모두 고생했으니까.” 4년 전 ‘악명’ 높은 수습기자 교육이 끝나갈 무렵 동기 이현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큰 덩치에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덥수룩한 수염 자국 때문에 여간해선 잊히지 않는 외모의 현우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제발 소름 돋는 얘기 좀 하지 말라”고 무안을 줬더니 “그런가?” 하면서 특유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때 차라리 안아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현우는 정이 많고 순박해서 놀려먹는 재미가 있었다. 몸에 열이 많다며 겨울에도 간혹 반팔 옷을 입고 나타나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매사에 진지하고 비장한 모습이 우스워 장난도 많이 쳤다. 사실은 그가 내 장난을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간혹 남한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일을 오래 곱씹어 기억했다. 볼멘소리를 해도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동료들은 그를 “얘기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됐다. 쉽게 꺼내기 힘든 고민의 조각도 우리는 그에게 어렵지 않게 털어놓았다. 수습기자 시절 그가 쓴 첫 단독 기사는 미담이었다. 새벽 시간 아픈 아이를 데리고 다급히 병원에 가다가 550만원이 든 가방을 두고 내렸던 젊은 부부에게 택시기사가 돈을 돌려줬다는 이야기. 아픈 아이를 안고 숨죽여 우는 부부가 눈에 밟혔던 택시기사는 사례비도 거부했다고 한다. 현우 자신이 했을 법한 일을 찾아내 썼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덕업일치’(관심사와 직업의 일치)를 이뤘다던 스포츠 기자 시절에는 저녁 야구 경기를 보며 기사 쓰는 일을 행복해했다. 눈앞에 다가온 도쿄올림픽을 취재하지 못하고 부서를 떠나게 됐을 때 못내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치부 기자로 그를 만났던 취재원들은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박성민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반짝이는 눈으로 이것저것 질문해주던, 예의를 다해 상대방을 존중해주던 모습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현우는 가벼운 수술을 받다가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 소식을 전해준 이에게 “말이 되느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메시지가 쌓이던 동기 단톡방은 그날 이후 대화가 끊겼다.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고, 현우는 끝내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불쑥불쑥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앞으로 함께해야 할 좋은 날들을 놔두고 왜 그리 서둘러 가느냐고 묻고 싶다.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레 떠나보내는 일은 몹시 가혹했다. 남겨진 이들이 겪는 고통과 상실에 대해 그동안 너무 쉽게 말해온 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우리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어 허둥대는 동안 현우는 장기기증을 했다. 우리가 억울해하고 허망해하는 동안 그의 가족은 가슴 아픈 선택지 앞에서 숭고한 결정을 내렸다. 심장 췌장 등 여러 장기를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대하던 생전의 모습 그대로 이제 누군가의 생명을 이어주게 됐다. 국내에서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는 4만명이 넘지만 뇌사 기증자는 지난해 478명에 그쳤다. 하루에 일곱 명꼴로 이식을 기다리다 목숨을 잃는다. 장기기증 희망등록자가 전체 인구의 3%에 머무는 상황이 현우와 같은 이들의 나눔으로 조금씩 진전돼 가고 있다.

현우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기가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그렇게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장기가 누구에게 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어느 지역으로 갔는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 지역을 찾아다니며 아들을 기억하고 그 추억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 누군가는 현우의 눈으로 세상을 내다보고, 현우의 심장으로 이웃들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고 있으리라.

정부는 지난 3월 장기기증과 관련된 첫 종합지원계획을 확정했다. 기증자와 그 가족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서울시는 올해 장기기증자들을 추모하는 국내 첫 기념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현우 가족처럼 쓰라린 고통을 삼켜야 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해줘야 할 것은 기억하는 일이다. 늦게나마 시작되는 정부의 노력이 차질 없이 진행되길 바란다. 전과는 같을 수 없는 시간이 다시 흐른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가 기억날 것이다. 너를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해주려 한다.

이형민 사회부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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