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키드'라 불리던 김태술 은퇴, 저물어가는 황금세대
[이준목 기자]
2007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는 한국농구사에 '황금세대'를 배출한 드래프트로 꼽힌다. 양희종(안양 KGC인삼공사), 정영삼(인천 전자랜드), 함지훈(울산 현대모비스), 김영환(부산 KT) 신명호·이동준·이광재(이상 은퇴) 등 2007 드래프티가 배출한 선수들 상당수가 프로농구에 한 획을 그은 선수들로 성장했다. 바로 이듬해 하승진-윤호영-강병현-김민수 등을 배출한 2008년 드래프티와 더불어 같은 해에 스타급 선수들이 이 정도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것은 한국농구 전체 역사를 돌아봐도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유난히 쟁쟁한 선수들이 넘쳐났던 2007년 신인드래프트에서도 동기들을 제치고 당당히 1순위로 뽑혔던 선수는 바로 김태술이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신인드래프트에서 포인트가드 포지션의 선수가 1순위로 호명된 사례는 역대 24번중 단 6번에 불과했다. 김태술을 비롯하여 2004년 양동근(현대모비스, 은퇴), 2009년 박성진(전자랜드, 은퇴), 2010년 박찬희(전자랜드), 2012년 김시래(삼성) 2017년 허훈(KT)이었다. 이중 박성진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드로 성장했다.
다만 다른 포인트가드 1순위 지명자들은 그해 신인드래프트에서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독보적인 위상을 지녔던 반면, 김태술은 앞서 언급했던대로 황금세대의 일원이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였다. 쟁쟁한 포워드나 빅맨들이 넘쳐났던 드래프트에서 당당히 1순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김태술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한때 농구계에서는 '천재 포인트가드 6년 주기설'이라는 가설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66년생인 강동희(영구제명)를 시작으로 72년생 이상민(삼성 감독)-78년생 김승현(은퇴)까지 6년마다 리그 판도를 뒤흔들어놓은 특급 가드가 등장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세 명은 모두 프로농구에서 MVP를 수상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국가대표 주전가드까지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계보를 이을 기대주로 꼽힌 것이 바로 84년생 김태술이었다.
물론 6년주기설은 지금은 추억의 에피소드 정도로 사장된 가설이다. 이 이론대로라면 훗나 프로농구 역대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한 양동근(81년생)이나 누적 기록의 1인자 주희정(77년생)-현재 KBL 최고의 포인트가드 허훈(95년생) 등의 등장을 설명하기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농구는 '가드왕국'이라고 할 만큼 각 팀마다 정상급 포인트가드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고, 그 와중에 등장한 김태술이라는 선수가 등장이 주목받은 것은 그만큼 농구계와 팬들에게서 고전적인 '정통 포인트가드'의 향수를 이을만한 적통으로 꼽혔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산 동아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김태술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때마침 김태술이 입단한 서울 SK 나이츠는 포인트가드 부재에 허덕이고 있었던 데다 '스포엔터테인먼트' 정책을 통하여 선수들의 스타성을 부각시키는데도 적극적인 구단이었다는 점은 행운이었다.
김태술은 입단 첫해인 2007-08 시즌부터 평균득점 10.7점, 7.3 어시스트, 1.7스틸이라는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소속팀 SK를 오랜간만에 6강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은 공을 인정받아 경쟁자인 함지훈-양희종 등을 제치고 당당히 신인왕까지 차지했다. 어시스트는 주희정에 이어 소수점 차이로 아쉽게 밀린 리그 2위였다. 신인답지않은 여유와 자신감, 언론 인터뷰에서 침착하게 할 말을 다하는 능숙한 화술 등은 준비된 스타라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SK에서 시도했던 '별명 유니폼'만들기에서 김태술에게 붙인 '매직키드'라는 닉네임은 그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수식어가 됐다.
김태술은 2년차 2008-09시즌을 마치고 그해 MVP였던 주희정과 맞교환되어 안양 KGC로 전격 트레이드됐다. 프로농구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트레이드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사건이다. 당시 '윈나우'를 추구하던 SK와 '리빌딩'을 원했던 인삼공사의 요구가 서로 맞아떨어졌다. 공익근무로 2년간 자리를 비워야했던 김태술은 2011-12시즌부터 인삼공사의 유니폼을 입고 다시 프로무대로 돌아왔다.
당시 인삼공사는 김태술-양희종-오세근-이정현-박찬희로 이어지는 역대급 라인업을 구축하며 인기 아이돌그룹 동방신기를 패러디한 '인삼신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태술은 인삼공사의 주전 가드로 활약하며 챔피언결정전에서 원주 DB를 꺾고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고 시즌 베스트 5에도 이름을 올리며 농구인생의 절정을 맞이했다.
김태술은 국가대표팀에서도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2015년 FIBA 아시컵까지 양동근과 함께 한국농구대표팀의 백코트진을 꾸준히 책임졌던 몇안되는 정통 포인트가드였다. 유재학 감독과 함께했던 2013년 FIBA 아시아컵 3위, 2014 농구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필리핀과 이란을 꺾고 안방에서 12년만의 금메달에 기여하며 한국농구의 마지막 황금기를 함께했다.
아쉬운 것은 전성기가 그리 길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태술은 인삼공사에서의 말년이었던 2013-14시즌부터 이미 계속된 잔부상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기량이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혹사도 비시즌에 휴식을 충분히 취하지못하여 슬럼프에 빠지는 원인이 됐다. FA로 큰 기대를 받으며 입단했던 전주 KCC에서는 사실상 먹튀로 전락했고 이후 삼성으로 이적하며 식스맨으로 잠시 반등하기도 했으나 끝내 전성기의 기량을 다시 회복하지는 못했다. 2019-20시즌부터는 원주 DB로 자리를 옮겨 인삼공사 시절에 우승을 함께했던 이상범 감독과 재회하여 두 시즌을 소화했다.
'원클럽맨'이나 프랜차이즈스타로 남았던 절친 양희종이나 정영삼, 함지훈같은 동기들에 비하여 김태술은 말년에 반복되는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점점 떨어지며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은 가장 아쉬운 장면이다. 뛰어난 패스능력과 농구센스는 출중했지만 가드로서는 평범한 스피드와 중장거리슈팅 능력, 부족한 내구성 등, 갈수록 공격성과 활동량을 중시하는 현대농구의 흐름에 뒤처진 올드스쿨형 포인트가드의 한계도 드러냈다는 평가다.
김태술은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백업 가드로는 아직 1~2년더 충분히 선수생활을 이어갈수 있었지만, 김태술은 아직 아쉬움이 남아있을 때 깔끔하게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은퇴식 일정은 DB 구단과 추후에 논의할 예정이며 김태술은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술은 공익근무 기간을 제외하고 프로무대에서 총 12시즌을 활약하며 통산 520경기 평균 7.7점, 4.5어시스트의 성적을 남겼다. 통산 어시스트는 역대 7위(2335개), 스틸은 역대 9위(720개)에 이르는 기록을 남겼다. 포인트가드 6년주기설로 함께 묶였던 전설적인 선배들에 비하면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프로와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우승도 경험해봤고 한 시대를 풍미한 가드로서 성공적인 농구인생을 보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태술의 은퇴는 KBL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2007년 드래프티들도 어느새 농구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올 시즌 양희종이 인삼공사에서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김영환-정영삼-함지훈 등이 소속팀에서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어느새 이들 모두 소속팀에서 최고참이 되었다.
김태술, 이광재나 이동준처럼 하나둘씩 은퇴하는 선수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양동근-전태풍의 은퇴에 이어 농구팬들로서는 또 한 번 한 시대를 풍미한 가드를 아쉽게 떠나보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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