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눈빛으로 그려낸 가출 청소년 심리적 혼돈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면서도 웃는 이해하기 어려운 배역
약속된 연기 외 구상한 연기 한 번씩 더 보여..자아 발견에 초점
영화 ‘박화영(2018)’에서 세진(이유미)은 친구들에게 대뜸 임신 테스트기를 들이민다. 미성년자지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해죽 웃으며 좋아한다. "이거 봐라. 나 요즘 속도 안 좋고, 잠도 많이 오고, 생리도 안 한다. 이렇게 되면 임신인 거야?" "헐, 너 또라이니?" "흐흐흐~"
이해하기 어려운 배역은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주인공으로 조명된다. 첫 장면부터 이상하다. 자해하는 모습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중계한다. 이튿날 학교에서는 상반된 얼굴이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실실 웃는다. 자기를 임신시킨 선생님 앞에서도 싱글벙글댄다.
"내가 알아서 해볼게." "아니, 뗄 거라니까. 수술할 건데. 지울 거임. 얼마래? 오빠, 얼마나 할까나?" "아니,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왜 자꾸 그래." "졸려."
이야기는 인공임신중절을 위한 가출로 이어진다. 세진은 여전히 미성숙하다. 자아개념도 낮다. 또래와 함께 움직이며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려 든다.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그들이 만들어낸 향락문화마저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으로 학습해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이환 감독은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야기에서 가족불화, 부적응 같은 기능적 결함에 천착하지 않는다. 세진의 자아 발견 과정에만 초점을 둔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이유미는 별 대사 없이도 수없이 부딪히고 깨지는 심리적 혼돈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실제 가출 청소년에게서 나타나는 해방감, 죄책감, 고독감, 고립감, 불안감, 양가감정, 허무감 등이다. 뚜렷하게 구분하기보다 하나로 연결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동력으로 표현한다. 자기관념의 굴레를 깨고 돌아오는 가출 청소년의 의미 있는 회귀를 가리킨다.
-단번에 세진을 이해하진 못했을 것 같은데….
"맞아요. 특히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성향이 의아했어요. 또 다른 주인공인 주영(안희연)과 한 배를 타는 계기조차 특별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세진을 이해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어요. 단순하게 생각하니까 궁금증이 해소되더라고요. 아이들은 서로를 몰라도 놀이터에서 금방 친해지잖아요. 세진과 주영도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배경 등을 따지지 않고서도 친해질 수 있는 순수한 사람들인 거죠."
-연출보다 연기로 밀어붙이는 장면이 꽤 있던데.
"특정 이미지보다 세진만의 정서를 보이는 데 많이 공들였어요. 촬영 전 다양한 감정과 행동 표현으로 기본 결을 잡아갔죠. 특별한 대사나 행위가 없어서인지 혼란한 마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충분한 설득력을 부여해야 하다 보니 섬세한 조절이 필요했죠. 많이 찍는 수밖에 없었어요. 약속된 연기 외에 제가 구상한 연기를 한 번씩 더 보여줬죠.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정말 큰 차이가 있었어요. 그걸 알아준 이환 감독에게 고마웠어요."
-세진의 변화하는 흐름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았던데.
"시퀀스 전환에서 특히 그랬죠. 겉보기에는 가출한 뒤 달라진 점이 거의 없을 거에요. 마음은 분명 달라져 있어요. 그렇다고 외형까지 갑자기 바꾸면 인위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옅은 감정 처리라고 해야 할까요? 너무 어려웠어요. 이환 감독의 조언과 배우들의 신뢰가 없었다면 중심을 잡지 못했을 거예요."
-가만히 앉아 다른 배역들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유독 많던데.
"맞아요(웃음). 뭔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정도였죠. 외부와 소통하는 것보다 그녀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게 중요한 영화잖아요.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 많은 걸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눈빛으로 많은 감정을 가리키던데.
"세진의 마음으로 연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표현 아닐까요? 동료 배우들이 잘해준 덕이에요.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어서 세진과 동일시될 수 있었어요. 실제로 촬영하며 여러 번 마음이 아팠어요. ‘컷’ 소리가 나도 바로 회복되지 않았죠."
-세진의 앞날이 밝아졌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특별한 희망을 찾진 못했지만 가족에 대한 갈망이 생겼잖아요. 무엇이 소중한지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관심이 필요할 수 있어요. 담배를 계속 피우거나 자해를 반복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큰 깨달음은 얻었잖아요.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용기로 이어질 거라고 봐요. 그렇게 믿고 싶고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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