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알프스'가 있습니다
[남준식 기자]
영남알프스. 이 어색한 단어의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가 흔히 아는 알프스라 하면 프랑스에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지나 오스트리아까지 뻗은 하얀 산맥을 가리키는 것인데, 고도만 어느 정도 높다 하면 죄다 알프스를 갖다 붙이니, 뉴질랜드와 일본 그리고 중국에 이어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알프스가 있다.
▲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 800m 고지에 데크가 설치되어 남녀노소 편하게 걸을 수 있다. 4월 중순에 촬영한 모습. |
ⓒ 남준식 |
누가 처음 그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영남알프스는 밀양·울산·양산·청도에 걸쳐 형성된 해발 1000m가 넘는 9개 산이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중에서도 가지산(1241m)은 이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고, 신불산(1159m)과 재약산(1108m), 천황산(1189m), 운문산(1188m)은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에 통째로 포함될 정도로 영남알프스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선물 보따리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 60만여 평, 간월재 10만여 평, 그리고 재약산 사자평 125만여 평은 온통 억새밭 천지다. 이 노다지를 어떻게 개발할지 궁리하던 울주군은 2012년 총 1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탐방길을 조성했다. '하늘억새길'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하늘억새길을 걸으려고 영남알프스를 찾는다. 트레킹 코스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벤치마킹한 하늘억새길은 길이 30km, 완전히 도는 데만 20여 시간이 걸리는 제법 긴 코스인지라 총 다섯 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넓디넓은 산자락에 처음 발을 디딘 외지인은 응당 어느 구간을 걸어야 할지 헷갈릴 만도 한데, 배내고개~능동산~얼음골 케이블카~샘물상회~천황산~재약산~사자평~주암계곡~주암마을 코스(약 6시간 소요)를 걸어봐야 비로소 영남알프스의 하이라이트를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 가야 할까? 은빛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가을을 비단 최고로 치겠으나, 눈 녹고 녹음이 짙어지기 전 억새 위로 피어나는 봄 아지랑이 또한 아는 사람만 아는 영남알프스의 멋이다. 긴 겨울 보내고 따가운 봄 햇볕에 바싹 구워진 억새 한 대 꺾으면 수수깡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밀양 장꾼과 언양 장꾼이 물건을 교환했다던 배내고개는 지금도 산간 오지이지만 하늘억새길의 출발점이 되면서 그나마 등산객으로 활기가 돈다.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만 오르다 보면 능동산(981m) 정상이 보이고, 임도를 따라 다시 1시간 정도 걸으면 얼음골 케이블카가 나온다.
▲ 샘물상회 메뉴는 단촐하지만 하나같이 맛이 좋다. 4월 중순에 촬영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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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의 본래 지명은 천화(穿火), 즉 '막힌 하늘을 불로 뚫었다'는 뜻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일제강점기에 스키장을 만들려고 울창한 숲을 불태운 결과가 현재의 사자평이다. 그러나 소백산맥에 가로막힌 울산 내륙에는 눈이 적게 온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나 보다. 결국 스키장 개발은 무산됐고, 아름드리 미인송이 자라던 숲은 억새로 뒤덮인 고산습지가 됐다.
그런데 '천황산(天皇山)' 역시 일제가 붙인 이름이란 설이 있다. 실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산악테마전시실에 설치된 천황산 관련 전시물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다.
"원래 이름은 사자산이라고 하며 (중략)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0년대 중반에 천황산으로 고쳐 부르다가 약 70년 만인 1995년 경상남도에서 '왜곡된 지명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정부의 승인을 받은 후에 사자봉으로 바뀌었다."
다만,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밀양시 측이 '천황산'이라는 지명이 일제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국가지명위원회에 명칭 변경을 신청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울주군과 울산시 측은 '천왕산'이라는 명칭이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었고,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변경된 이후 '천황산'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국가지명위원회는 명칭 유지를 결정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사자평에는 갈 곳 없는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들은 고사리를 심었다. 마을이 80여 호까지 커지자 덩달아 늘어난 화전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1966년 지어진 밀양 산동초등학교 사자평 분교의 별명은 그래서 '고사리분교'였다. 교실 한 칸에 선생님 한 분, 학생 서너 명...
▲ 고사리분교터 재약산(수미봉)이 굽어보고 있다. 4월 중순에 촬영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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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산행으로 지쳤다면 신불산 자락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등억리에서 쉬어가도 좋다. 억소리 날만큼 오르기 힘든 고개라 해서 등억(登億)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마을은 80년대 후반 대규모 온천단지로 개발되면서 그 옛날 고즈넉한 맛은 사라졌다고 하나 영남알프스를 오르는 사람들에게 쉼터로서의 역할만큼은 옛날과 다를 바 없다.
뜨거운 물까지 맞아가며 기력을 회복해야 하는 까닭은 사자평 억새밭과는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신불공룡능선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설악 공룡능선이나 해남 달마고도만큼 다이내믹한 손발짓을 요구하진 않지만 적당한 고도감과 아기자기하게 걷는 맛이 일품이다.
▲ 신불공룡능선 길게 뻗은 능선 오른쪽으로 간월재가 보인다. 3월 말에 촬영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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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아지트이기 이전엔 호랑이 소굴이었다. 운문산은 '호랑이가 거(居)하던 산'이라는 뜻의 호거산으로 불렸으며, 운문산에는 범봉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신불산 아래에는 '영호영세불망비'라는 호랑이 무덤이 있는가 하면, 간월재를 넘을 땐 7명 이상이 모여야 움직였다고 하니, 영남알프스에 얼마나 많은 호랑이가 어슬렁거렸을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 간월재 신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간월재와 간월산. 3월 말에 촬영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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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라는 빼어난 관광자원을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울주군은 글로벌 산악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 이탈리아 토렌토영화제와 더불어 세계적 권위를 갖는 캐나다 벤프영화제를 벤치마킹했다. 울주영화제는 세계 3대 산악영화제이자 아시아 대표 산악영화제로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6회째를 맞는 올해부터는 봄에 열렸다(4월 2일~11일). 앞으로 영남알프스를 봄에 찾아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이다.
▲ 언양불고기 밥그릇 비우는 것은 시간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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