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은 25년 반도체 헛발..대만은 TSMC 위해 농사도 막았다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메모리 위주로 되어있는 생산구조가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균형있게 생산하는 선진국형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현 정부가 하는 말과 비슷하다. 하지만 요즘 나온 얘기가 아니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7월 임창열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이 산학연 간담회에서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으면서 한 말이다. 임 장관은 이 자리에서 “2005년 시스템 반도체 비중이 세계 시장에서 10%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듬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100대 중점과제’에도 시스템 반도체 지원 사업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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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 투자 7000억…여전히 3%대 점유율
정부가 지금까지 시스템 반도체 지원에 7000억원대 자금을 투입했으나 ‘사실상 헛방’이었다는 평가다. 12일 반도체업계와 학회 등에 따르면 정부는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팹리스(설계전문회사) 육성, 생태계 활성화, 저전력 소재 개발 등에 7654억원의 예산을 지원했다. 여기에다 2030년까지 1조원을 집행한다는 방침이다.
시스템 반도체를 키우겠다고 선언한 지 올해로 25년째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2005년 10% 달성을 장담했던 시스템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2019년 기준 3.2%에 그친다. 휴대폰과 TV·자동차용 반도체 국산화에 도전했지만 한 건도 성공하지 못했다. 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한양대 교수)은 “반도체 사업은 대기업의 영역이라 ‘알아서 잘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심지어 2014~15년엔 지원이 중단됐다. 최근 고급인재 부족은 이런 데서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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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국산화 성공사례 한 건도 없어”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와 연산·제어하는 시스템 반도체로 나뉜다. 한국이 강자인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27%가량 된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쳐 D램은 71%, 낸드플래시는 45%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올 들어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 미국·중국 갈등 등 반도체 시장이 급박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팔짱만 끼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정부가 조만간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내놓을 계획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일 “앞으로 2800억원 규모의 신규 펀드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헛발 지원’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프로젝트를 꼽는다. 총 122조원을 투입해 반도체공장 4개를 짓는 이 사업은 당초 지난해 말 행정 절차가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3월 말에야 최종 승인을 거쳐 현재 토지 보상이 진행 중이다. 환경영향평가 대상 지역이 안성시로 확대되면서 4개월가량 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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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선 설치에만 5년 “정부가 사회갈등 줄여야”
박재근 학회장은 “삼성전자가 평택공장을 지을 때 송전선 설치에 5년이 걸렸다는 건 유명한 얘기”라며 “정부의 역할은 사회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적기에 생산 활동이 이뤄지도록 밀착 지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만은 이런 면에서 한국과 대조된다. 대만은 올해 가뭄이 지독하다. 하루 20만t의 물이 필요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TSMC 공장에 비상이 걸렸다. 산업폐수를 정수해서 재활용하는 ‘물 공장’까지 만들고 있다. 그러자 차이잉원 총통까지 나서서 ‘농사 불허’를 결정했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대만은 죽기 살기로 반도체에 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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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머리 위로 운석 떨어지는 상황”
범진욱 반도체공학회장(서강대 교수)은 최근 국내 반도체산업의 현주소를 “6500만 년 전 공룡의 머리 위로 떨어진 운석과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에서 ‘초격차 전력’이 위협받고, 시스템 반도체는 고전하고 있어서다.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파운드리 세계 1위가 되겠다고 선언했으나 여전히 TSMC의 벽이 높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올 1분기 시장점유율은 56%로 지난해 동기(48%) 대비해 8%포인트 늘었다.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19%에서 18%로 줄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필두로 미국에 투자하라는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는 20일(현지시간) 지나 러만도 미국 상무부 장관 주재로 열리는 ‘반도체 서밋’에 초청받았다. 특히 이튿날인 21일엔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간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어 삼성이 ‘투자 보따리’를 풀어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미국에 170억 달러(약 19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라인 증설을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외부로 발표하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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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투자 망설이면 벼랑 끝 몰릴 수도”
전문가들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개편 시도를 기회요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진단한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서울대 명예교수)은 “SK하이닉스가 인텔로부터 인수 예정인 다롄공장을 더하면 시안(삼성)·우시(하이닉스) 등 중국에 3개의 한국 공장이 운영된다”며 “이것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고슴도치의 가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처를 두는 대신, 이를 지렛대 삼아 미국 투자를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김형준 단장은 “오히려 이 기회를 놓치면 벼랑으로 몰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재근 학회장도 “지금 미국은 첨단 파운드리가 필요하고, 삼성전자와 TSMC만이 가능하다. 투자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엔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조중휘 인천대 임베디드시스템공학과 교수(반도체소사이어티 회장)는 “반도체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인식 아래 대통령이 나서서 투자를 지휘할 때 미래먹거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예산 지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반도체장비 업체인 세메스의 강창진 대표는 “수억~수십억원으로 잘게 나눠 ‘n분의 1’로 지원하는 방식으론 과거에도, 앞으로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며 “목적이 뚜렷한 톱다운형 과제를 제시하고, 지원도 파격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박형수·최현주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시스템 반도체=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비메모리 반도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데이터 처리·통신·변환 등의 역할을 하며 관련산업은 크게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 중앙처리장치, 그래픽처리장치 등으로 나뉜다. 부가가치가 높고 고객 맞춤형 생산이 가능해 시황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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