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비바람도 있는 인생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의 복잡한 감정은 어느 사이에 사라지고 순례를 끝마쳐야 한다는 목적만이 남았다.
78번 고쇼지(鄕照寺)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절 스님이었던 림아 스님이 개에게 쫓겨 상처 입은 새끼 너구리를 구해 잘 치료해 숲으로 돌려보냈다. 후에 림아 스님이 교토 큰 절로 간 뒤 전쟁과 기근으로 절이 황폐해져 악인들이 절의 기물을 훔치고 훼손하자 너구리 도깨비가 나타나 악인을 내쫓고 절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 뒤 너구리를 고쇼지 수호신으로 섬기게 됐고 이 근처에서는 너구리를 다치게 만든 개를 지금도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역에서 고쇼지까지 가는 동안 마을에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납찰(순례자들의 명함)을 주는데 빨간색이다. 지바현에서 온 이마이 노부타카상이었다. 순례를 7~24회까지 할 때는 빨간색의 납찰을 사용하니 머지않아 그의 납찰은 은색(25회 이상)으로 바뀔 것이다. 과연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수제 아이스크림 맛에 감탄했다. “언제까지 순례를 할 예정이냐” 물으니 “걸을 수 있는 한”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숙소는 근처에 민박을 정해뒀다. 민박 에비스야는 세탁 서비스를 해줄 뿐 아니라 냄새 안 나는 파스까지 제공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불에 파스 냄새가 배지 않게 하려는 세심함이다.
대만에서 온 린타이홍이라는 청년은 일본 쌀이 정말 맛있다며 밥을 몇 공기나 먹어치워 에스비야 주인을 즐겁게 했다. 다음 날 린타이홍과 81번 시로미네지(白峰寺)까지 같이 걸었다. 81번에 올라가는 산길 초입에 마을 주민인 듯한 중년 남자가 바구니를 들고 서서 사탕을 오셋타이(보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출발이 됐다.
81번에서 기도를 하다 보니 이제 사찰도 몇 개 남지 않았는데 나에게 상처 줬던 사람들을 위한 기도도 과연 할 수 있을까 괜히 조바심이 났다. 용서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면 내가 편해질 것이라 믿었다. 납경을 받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체상” 하고 부른다. 어제 함께 걸었던 노부타카상이다. 반갑게 인사했더니 배낭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지바현에서부터 가져온 에코백과 수건이라고. 내가 책갈피를 준비했듯 그도 기념품을 챙겨온 듯싶었다. 나도 책갈피를 기념으로 드렸다. 책갈피를 납경장에 넣은 그는 미소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82번 네고로지(根香寺)까지 걷고 나니 더 이상은 걸을 자신이 없었다. 마저 걷겠다는 린타이홍과 헤어져 버스를 탔다. 84번 야시마지(屋島寺)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 우동 투어를 알아보니 신청이 마감됐다 한다. 가가와현은 800여개 우동집이 있을 만큼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이다. 면발이 굵고 찰기 좋은 사누키 우동을 좋아해 순례 중에도 자주 사 먹었다. 매우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우동 투어를 위해 다카마쓰에 더 머물 수는 없었다.
다카마쓰에서 예정했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87번 나가오지(長尾寺)를 참배하고 나가려는데 커다란 비석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인생은 헨로(순례)’라고 써 있었다. 87번까지 온 여정이 눈앞에 스쳐 가면서 저절로 공감의 미소를 짓게 됐다.
1200㎞의 긴 여정이다. 우리 인생은 길어야 100년이지만 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비바람 치는 진흙탕도 있고 햇빛이 감싸주는 부드러운 잔디밭도 있는 순례길과 무엇이 다르랴. 88번 오쿠보지(大窪寺) 순례를 마치고 다시 도쿠시마로 가서 1번 사찰에서 마지막 납경을 받아야 순례가 끝이 난다. 88번 오쿠보지에 들러 기도를 하고 납경을 받은 뒤 버스 정류장으로 오니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헨로상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근처 상가에서 주인들이 주전자를 들고 나와 따끈한 생강차를 오셋타이했다. 아침부터 바람이 많이 불어 얼었던 몸이 생강차 한잔에 녹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받은 오셋타이가 새삼 고마웠다.
버스에 타자 운전기사가 내릴 곳을 묻는다. 대부분 고속버스 정류장이나 나가오역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역으로 가는 사람은 다음 일정이 남아 있고 고속버스 정류장에 내리는 사람들은 고야산으로 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코보대사가 만든 진언종 총본산이 있는 고야산은 헨로상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꼭 한 번은 가봐야 하는 곳으로 꼽는 신성한 장소다. 88곳 사찰 순례를 마친 불교 신자들은 고야산으로 가서 코보대사께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고 보고하는 것을 의식으로 여긴다고 한다.
나 혼자 뜬금없이 헨로교류살롱(헨로상들에게 쉴 곳과 간식, 물 그리고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곳)에서 내렸다. 헨로교류살롱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88개 사찰 조감도였다. 1번 스위치를 눌러보자 1번 사찰의 불이 들어왔다. 순서대로 스위치를 눌러보며 그간의 여정을 돌아봤다. 분명 힘든 순간도 있었고 무서워 오금이 저린 순간도 있었고 외로워서 아무도 없는 산길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던 순간도 있었다. 사찰 하나하나씩 확인하는데 30여일이 거짓말처럼 빨리 지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88개 스위치를 모두 눌러보는데 괜히 울컥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교류살롱 명부에 국적과 이름을 기입하면 88 사찰 순례 홍보대사 임명장을 준다. 1200㎞를 걸으면서 체험한 시코쿠 문화를 널리 알려달라는 의미다. 임명장을 받아들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마지막 납경이 남은 만큼 감상은 뒤로 미루고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8호 (2021.05.12~2021.05.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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