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강양오 2021. 5. 1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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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오 기자]

▲ 누군가에세는 영원히 숨쉬는 그 날의 기억 기억과 시간에 대한 모습
ⓒ 강양오
교문 앞에 들어섰다. 마음만큼이나 가파른 등굣길을 걸었다. 혼자였다. 마지막 계단 끝에 길게 늘어선 복도에는 몇몇 친구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친구들을 따라 신발장 앞 쪽으로 설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탁! 고등학교 1학년 복도. 그 날 아침 지각의 벌로 맞은 한 대. 참 아프고도 무거웠다. 울었다. 억울해서. "교무실로 따라와."

의아하셨던 걸까. 선생님은 내게 우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야말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등교 전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니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어쩌면 나는 그날 이 한마디로 선생님을 내가 맞은 한 대보다 더한 매를 때린 건 아니었을까. "차비 빌리러 삼촌 집에 갔다 늦었어요. 제가 왜 맞아야 하죠?"

생각해보면 내게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선생님께 그런 이야기를 했을지도.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닌데 눈 떠보니 어지러운 집안 상황에 시간이 지체되고 차비마저 없었다. 20분을 걸어 삼촌 집에 도착해 돈을 받아 등교하던 아침. 선생님은 평소와 다른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잊지 못할 그 선생님 

"몸이 안 좋구나! 어서 집에 가."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교무실에 갈 때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실 세 번 중에 한 번은 다른 일 때문이라고 말도 못하고 그냥 집으로 간 적도 있다. 어쩌면 갑자기 쓰러져 학교 근처 내과에 실려 가는 일이 종종 있던 나였기에 선생님의 그런 반응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동네책방에서 주최한 청소년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청소년 작가의 생각과 꿈이 궁금하기도 했고 추억이 담긴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주제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중학교 시절 음악선생님이 선물해준 책을 소개했다.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청소년 작가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학교 후배라는 사실. 더불어 내게 책을 선물해준 첫 어른인 음악 선생님이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과 본인이 학창시절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셨던 미술 선생님의 제자라는 이야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난 반가움에 우린 둘 다 너무나 놀랐다. 반가운 선생님들의 이름을 듣고 나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 학교 홈페이지를 찾았다. 나는 시내에 있는 한 재단의 기독학교인 여중 여고를 다녔다. 사진을 보니 강당의 모습이 그대로였다. 그 강당에서 중학교 전교음악부장이었던 나는 행사와 예배시간에 피아노를 쳤고 고등학교 때 종교부장을 맡았던 나는 예배 준비를 위해 분주했다. 전북 시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 왔을 때도 바로 그 강당에서 이름이 불렸다. 여러 날들의 기억에 어느새 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 있었다.

내가 미술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계절마다 학교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와 백합, 소국을 샀다. 언젠가는 천 마리의 거북이를 담은 유리병을 선생님이 출근하기 전 교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나왔다. 나는 교무실이 좋았다. 선생님 책상 위에 놓인 정기 연주회 때 찍은 사진을 보고 싶어서. 빨간 드레스를 입은 나와 턱시도를 입은 선생님과의 다정한 기억. 그리고 선생님들을 향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미술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식사하고 나오시는 선생님을 향해 불렀다. "선생님" 하고 부를 때면 선생님은 언제나 손을 크게 흔들어 주셨다. 언젠가 선생님은 내가 부르기도 전에 2학년 교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신 적이 있었다. 1년이 지나 한 층 더 높이 선생님을 부를 때에도 선생님은 변함없이 양손을 흔들어주셨다.

교정 가운데에 자리한 보랏빛 구슬을 닮은 등나무 아래 벤치를 기억한다. 점심시간이면 선생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와 율무차를 마시며 장난하던 곳.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웃음이 많고 꿈이 많고 눈물까지 많던 몸이 약한 나. 그런 나를 선생님들이 채워주셨다. 살아갈 힘. 나를 향한 신뢰.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기억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학창시절에 그 시간들에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시를 쓰게 된 것도 음악을 사랑하고 꽃을 항상 그리워했던 이유도. 그 모든 것들이 선생님들을 통해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

선생님들은 사춘기 시절에 만난 내게 의미 있는 어른이자 친구. 그리고 그 시간을 잘 넘길 수 있도록 날 지탱해준 존재.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게 만드는 추억. 그 촘촘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지금을 살 수 있도록 도운 또 다른 이름의 부모.

한 대의 매. 한 권의 책. 한 번의 손 인사. 내게 일어났던 한 번의 사건들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박혀 수많은 날을 곱씹게 하고 그 시간을 추억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노력할 테니까.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어른이자 친구이길 바라니까.

죽은 시인의 사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는 분명하게 남아 영원히 살아 숨 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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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인의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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