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그라운드 음악은 나를 풀어주지

조효석 2021. 5. 12.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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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리스트] ② K리그 인천 해리슨 델브리지
델브리지가 경기장 라커룸에 누워 음악을 듣는 모습. 인천=윤성호 기자


"우리 둘 중 하나만 여기서 무사히 벗어난다면, 그건 내가 아닐 거라 약속할게. 그땐 네가 곁에 없을 테니."(If there's only one of us who walks away from this alright, I can promise it's not me. Cause you won't be by my side)

감미롭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 위에 연인의 언약이 노랫말로 이어진다. 너와의 기억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고 읊조리는 고백이다.

인천 유나이티드에 올해 입단한 호주 수비수 해리슨 델브리지(29)는 이 노래 '원 오브 어스'(One of Us)를 반년 전 아내와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길에 함께 들었다. 그는 대학 시절 만나 10년 가까이 연애한 아내와 3년 전 약혼했다. 코로나19로 결혼식을 미뤄야 했지만, 더이상 사랑하는 이와 갈라져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지난해 말 식을 올렸다. 델브리지가 홀로 한국에 입국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노래를 부른 호주 출신 알앤비(R&B) 가수 퀸 루이스(Quinn Lewis)의 성은 그와 같은 델브리지다. 다름 아닌 그의 친동생이다. 함께 노래를 듣고 부르며 자란 형제는 지금도 수시로 태평양 너머 이국땅에서 노래와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는 "아내가 동생의 곡을 정말 좋아한다. 이 노래는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아내는 이번 주 한국에 들어온다. 국민일보는 지난 6일 인천 선수단의 훈련장소인 인천문학경기장에서 그를 만났다.

각각 델브리지의 친동생인 가수 퀸 루이스, 델브리지가 좋아하는 알앤비 가수 톰 미쉬와 래퍼 스톰지의 앨범 커버·프로필 사진(왼쪽부터). 인천=윤성호 기자

‘음악 가족’서 자란 축구선수

델브리지의 아버지는 클래식 록밴드 멤버였다. 아버지는 누나와 동생, 그에게 항상 음악을 들려줬다. 그 영향으로 델브리지 남매는 악기와 친했다. 누나가 피아노를 치고 그와 동생은 기타를 주로 만졌다. ‘음악 가족’이었던 셈이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축구장에 데려다줄 때 차에서 에릭 클랩턴의 CD를 듣곤 했다”면서 “누나 동생과 함께 매일같이 노래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동생 퀸 루이스는 팝의 고장 미국에서도 점차 주목받고 있는 얼터너티브 R&B 가수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샘 스미스나 프랭크 오션, 제임스 블레이크 등과 같은 장르다. 2017년 싱글 ‘슬리핑’(Slipping)이 입소문을 타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노래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달콤한 목소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애달픈 사랑 노래가 많다.

동생은 16세가 되던 무렵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고 전공을 정했다. 델브리지는 “누나도 댄스와 노래에 다 소질이 있지만 공부를 선택했다. 셋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며 “지금은 광고회사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누나는 미국 뉴욕에, 동생은 ‘음악도시’로 불리는 내슈빌에 있다. 부모님은 로스앤젤레스(LA)에 있으니 가족이 각각 떨어져 지내는 셈이다.

그럼에도 델브리지의 가족은 항상 음악으로 연결돼 있다. 동생은 음악 작업을 하던 중 새 곡을 쓰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가족에게 보내준다. 동생뿐 아니라 가족들끼리도 서로 알게 되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주고받으며 감상을 공유한다. 델브리지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서로 음악을 주고받으며 연락한다”면서 “음악이 우리 가족을 이어준다”고 했다.

팝 가수인 동생이 멋진 분장에 옷을 차려입고 화면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그 역시 기분이 묘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동생이 뮤직비디오에서, TV에서 노래 부르는 걸 볼 때가 있다. 인간적으로 내가 아는 동생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아마 다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더 좋다. 난 동생 목소리를 집에서도, 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언제든 들을 수 있다”며 웃었다.

축구에도 음악이 필요해

동생이 R&B 가수라고 항상 잔잔한 노래만 들을 수는 없다. 경기를 앞뒀을 때, 집중해야 할 때는 듣는 음악도 달라진다. 다른 선수들이 그렇듯 비트가 빠르고 활력이 넘치는 노래를 주로 고른다. 그는 “요즘에는 영국 래퍼 스톰지(Stormzy)의 노래를 자주 듣는다. 비트가 쿨한 느낌이 좋다”면서 “주로 얼터너티브한 랩 음악을 많이 듣는다. 아니면 클럽에서 들릴 법한 하우스 음악도 고른다”고 말했다.

“축구선수들에게도 음악은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경기가 코앞인 상황에 기분을 빠르게 바꾸고 오직 시합 준비에 집중하는 데 음악의 역할이 크다는 설명이다. 델브리지는 “시합날 경기장에 도착하면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는다. 잡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잡음 제거가 잘되는 비츠(Beats) 헤드셋을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경기 뒤 물리치료실에서는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들으며 동료나 구단 직원들과 음악 얘기를 나누곤 한다.

경기나 훈련이 없는 날에는 동생의 노래처럼 긴장을 풀 수 있는 곡을 주로 듣는다. 최근에는 R&B 가수 톰 미쉬(Tom Misch)가 그의 선택지다. 최근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다. 음악적으로 통하는 동료도 벌써 팀에 생겼다. 그는 “동계훈련 기간 동료 김준엽과 같은 방을 썼다. 아는 노래를 듣고 있길래 얘기해봤더니 취향이 비슷했다”면서 “서로 좋아할 만한 노래를 보내주고는 한다. 덕분에 한국 노래도 많이 들어봤다”고 했다.

델브리지는 신장 193㎝의 거한이다. 크고 힘센 수비수인 그가 감성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게 얼핏 의아하게 들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델브리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사실 난 17~18세 때까지는 팀에서 가장 덩치가 작았다. 그때는 미드필더도 봤고 윙어도 봤다. 키가 큰 다음에는 타겟형 중앙 공격수로도 뛰어봤다”면서 “덕분에 수비수 중 기술이 좋은 편이라는 게 장점이다. 빌드업과 패스에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인천에 흐를 응원가를 위해

인천 유나이티드의 호주 출신 수비수 델브리지가 지난 6일 인천 구단 훈련장소인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공을 다루고 있다. 인천=윤성호 기자

델브리지는 이번 시즌만큼은 1부 잔류 경쟁에서 비켜나겠다고 선언한 ‘생존왕’ 인천이 야심 차게 영입한 선수다. 임중용 안재준 요니치 등 구단 ‘레전드’ 선수들이 거쳐 간 20번을 선뜻 내준 것도 그런 기대를 반영했다. 하지만 호주 프로리그 일정이 빨리 끝난 탓에 델브리지는 인천 구단 동계훈련에 합류하기까지 4개월 가까이 팀 훈련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몸이 올라오기 시작한 그는 몇 경기 사이 부쩍 발전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델브리지는 “인천에 올 때 리차드(현 성남 FC)나 비욘 존슨(전 울산 현대) 등 K리그에서 먼저 뛰어본 가까운 친구들이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당시에는 흘려들었지만 프리시즌 때 몸이 생각만큼 안 움직이자 그 충고가 생각났다”고 말했다. 그는 주장 김도혁과 오재석 오반석 김광석 등 동료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하며 “베테랑 선수들이 적응을 많이 도와줬다. 다른 팀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인천에 와서 행운”이라고 미소지었다.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그지만 노래방은 질색이다. 그는 “4만명 앞에서 뛰는 건 괜찮지만 한 사람 앞에서라도 노래하라고 하면 난 끝난 거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호주에는 새 팀에 가면 남들 앞에서 노래를 시키는 전통이 있다. 힘들었다”고 말한 그는 한국에도 비슷한 전통이 있다고 하자 놀라며 “외국인이라서 봐줬는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시킬지도 모르겠지만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델브리지가 경기장에서 가장 듣고 싶은 노래는 인천 팬들이 부르는 응원가다. 그는 “(호주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기도 전에 인천 팬들로부터 SNS로 메시지가 쏟아졌다. K리그에서 뛴 친한 선수들에게서 인천 팬들의 열정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경기를 제대로 못 뛸 때도 팬들은 (비난보다) 열심히 해달라는 응원을 보내줬다”고 고마워했다.

델브리지는 “전에 뛰었던 구단 중에는 (미국 구단) FC 신시내티 팬들이 가장 열정적이었다”며 “인천 팬들도 그들만큼이나 팀을 사랑하고 인천이라는 도시를 자랑스러워 한다. 인천에서 오래 뛴 선수들에게서도 같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대단한 팬들이 코로나19 때문에 경기장에 꽉 들어차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열정적인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인천=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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