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2021. 5. 1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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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숲은 평화롭다. 형형색색을 자랑하던 꽃이 진 자리에 돋아난 연초록 나뭇잎들은 모든 차이를 넘어선 무등의 세상을 보여준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하신 그분의 명령을 땅은 오늘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이니 모든 만물은 그분의 말씀이 깃든 텍스트이다. 숲이라는 텍스트 속에 들어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 고요한 평화가 스며든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잊고 있었던 경외감과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이 돌아온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가 예배당 종소리처럼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일상은 늘 나를 휘몰아대지만 그래도 그 흐름을 끊고 숲길을 걷는 여유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서재는 또 하나의 숲이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마음 둘 곳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때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일람한다. 책들은 내 마음의 역사이고 풍경이다. 눈에 띄는 책 몇 권을 꺼내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며 밑줄 친 부분을 읽다 보면 어느새 무겁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가끔은 새소리처럼 청량한 문장과 만나기도 한다.

평생 책과 함께 살아서인지 책이 꽤 많은 편이다. 몇 년 전 수천 권을 덜어냈는데도 집과 교회의 서재는 온통 만원이다. 도서관식으로 분류해 놓지 못한 탓에 책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때도 많다. 대부분 애서가가 겪는 일상이다. 처음 내 사무실에 들어온 이들은 대개 두리번거리며 책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문득 묻는다. “이 책 다 읽으셨어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다. 읽지 않은 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책 구입을 자제해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지만 관심 분야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를 보면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필요해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책들을 주문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딱한 노릇이다. 심문하듯 묻는 그 질문에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한다. “내일부터 읽으려고요.”

강연을 하거나 토론 모임에 참여하면 더러 듣는 질문이 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질문자의 독서 습관이나 문해력 수준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책을 소개하기란 여간 난감한 노릇이 아니다. 내게 좋은 책이 곧 그에게도 좋은 책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이도 있고, 위안을 얻고 싶어 읽는 이들도 있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책을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독서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고 싶다면, 다소 힘에 부치는 책을 선택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던지고 싶은 책들을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곡괭이질을 하는 것처럼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글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말했다. 작가의 그런 열정을 글 속에서 알아차리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인용해 독서로 얻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 하고, 활력을 느끼게 하고, 흥분시키는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에요.”

독서 행위는 수동적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작가와 더불어 적극적인 이해의 과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삶과 세계 혹은 인간에 대한 인식의 심화는 우리를 편협성의 늪으로부터 건져준다. 욕망의 바다를 는적거리며 헤매기보다는 인식의 광야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단련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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