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칼럼] 윤희숙의 나비효과

이철호 2021. 5. 12.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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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 이재명도 잇따라 저격받아
노동·복지 등 확실한 전문 분야
구체적 팩트와 선명한 논리로 압도
정치판 새로운 롤 모델 기대한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영리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유리한 위치에서 주로 싸운다. 구체적인 팩트와 생생한 사례, 선명한 논리로 상대방을 압도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의 그는 노동·소득·복지 분야의 손꼽히는 전문가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오래전부터 이재명 경기도 지사를 “타고난 싸움꾼”이라고 했다. 그런 이 지사가 윤 의원에게 잇따라 저격당해 휘청거리고 있다. 기본소득·재산비례 벌금·지역화폐·고졸 세계여행 1000만원 등 달콤한 카드를 꺼내 들 때마다 호된 카운터 펀치를 맞는다. 결국 “내 발언을 오독했다”라거나 “내가 한 말은 아이디어 차원”이라며 물러섰다. 윤 의원 SNS에는 “시원한 사이다 맛!” 같은 응원 댓글이 넘쳐난다.

지난 총선에서 그를 공천한 이인실 전 통계청장과 나성린 전 의원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공천 실패와 총선 참패로 내상이 컸는데 그래도 윤희숙 한 명은 확실히 건졌다”고 했다. 그동안 보수 정치권에는 율사 출신이 흔했다. 경제 전문가라 해도 관료 출신이거나 경제성장·구조개혁 같은 거대 담론 위주의 명문대 교수가 많았다. 딱딱하고 따분했다. 반면 윤 의원은 요즘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노동·소득·복지 같은 마이크로 분야 전문가다. 그가 쓰는 정확한 용어, 구체적 통계, 합리적 비판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전 청장은 이를 “증거기반 경제학(Evidence-based Economics)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윤 의원이 구체적 데이터와 정책을 다루는 KDI 출신이란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 이론과 학설 위주의 대학교수들과는 결이 다르다. “KDI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하기 전에 일주일간 내부 인트라넷에 공개한다. 누구나 익명으로 코멘트를 달고 격렬한 토론이 진행된다. 합리적 지적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비판에는 가차 없이 반박한다.” KDI 관계자는 “논쟁 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윤 의원 개인적 캐릭터도 선명하다. 그는 KDI 시절부터 똑 부러지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예전 국회 세미나에서 “의원들이 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느냐”는 쓴소리로 국회 모독죄를 뒤집어쓸 뻔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때는 “최저임금이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로 결정된다”며 최저임금 공익위원에서 사퇴한 소신파다.

윤희숙 열풍만큼 역풍도 거세다. 민주당은 상대편 최고의 저격수 잡으려 기를 쓰고 있다. 지난해 레전드가 된 “저는 임차인입니다”는 국회 5분 발언에는 “위장 임차인” “극단적 선동”이라며 온갖 흠집을 냈다. 최근에도 “비비 꼬인 좀비” “체급 올리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국민의힘 내부에도 칭찬과 격려만 있는 게 아니다. 윤 의원이 서울시장·당 대표 물망에 오르자 “초선이 너무 튄다”며 다선 의원들의 견제가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고질적인 내부 총질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나비 효과가 압도적이다. 보수 야권은 그동안 “독재 정권” “책임자 문책” 같은 판에 박힌 구호만 외쳤다. 툭하면 거리로 나와 삭발하고 단식했다. 내부에선 의리와 배신만 따졌다. 이에 비해 윤 의원은 여권 운동권 출신들의 급소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임대차 3법이 대표적이다. 김상조 당시 정책실장과 이호승 경제 수석은 “과거 전세 기간을 2년으로 늘렸을 때도 7개월간 불안정했다. 과도기의 불편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약속의 시간은 넘어갔다. 오히려 “전세는 빠르게 소멸되고 전세대란이 일어날 것”이란 윤 의원의 예언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런 합리적 분석과 상식적 비판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 모델이다.

최근 칩거 중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만나는 인물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나 권순우 자영업연구원장 등이 그들이다. ‘○○노믹스’ 같은 거대 담론 대신 최저임금이나 주 52시간제, 비정규직 문제, 자영업 고통 등 사회 현안에 대한 구체적 해법을 천착하는 전문가들이다. 이런 이유로 윤 전 총장이 이들을 접촉할 때마다 뉴스가 되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여권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윤 의원과 맞대응을 피하려는 눈치다. 본전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권에 논리적으로 맞설 제대로 된 스피커가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이 부랴부랴 제2, 제3의 윤희숙 물색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대선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묻어난다.

윤희숙의 나비 효과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눈높이도 높아지고 있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K-정치’ 같이 큰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윤 의원은 어려운 말(言)도 쉽게 한다. 이에 비해 다른 정치인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맞느냐 여부다. 윤 의원의 경쟁력은 그의 상식적인 말이 결국 현실로 맞아떨어졌다는 데 있다. 그에 대한 열띤 반응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제 정치에서도 전문적 능력과 구체적 팩트로 평가받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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