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 않는다"..대화 강조 '한또' 이한동 별세

김기정 2021. 5. 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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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 뒤 16대까지 내리 6선 의원을 지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JP화보집 〈운정 김종필〉 출판 기념회'애서 축사하던 모습. 연합뉴스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지난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군 복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제대 이후인 1963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하며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짧은 변호사 생활을 거쳐 1969년 검찰로 자리를 옮긴 고인은 서울지검 특수1부장과 형사1부장을 지냈다.

검사장 진급을 눈앞에 둔 1980년, 당시 막 집권한 신군부 측으로부터 정계 입문을 제안받은 뒤 고인의 인생도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애초 고인의 꿈이 검찰총장이었던 데다, 아내가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며 정계 진출을 막아서는 등 집안의 반대도 심했다고 한다. 고인의 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낸 김영웅씨는 “서슬 퍼렇던 신군부 시대에 그 명을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고인의 운명도 바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987년 11월 11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총재가 포천에서 이한동 의원과 함께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1년 당시 여당인 민정당 소속으로 고향인 경기 포천에서 당선돼 11대 의원이 된 고인은, 그곳에서 16대까지 내리 6선했다. 여당의 원내총무(현 원내대표)ㆍ사무총장ㆍ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을 두루 지냈고, 노태우 정부 시절 내무부 장관과 김영삼 정부 때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의원 시절 고인의 신조는 ‘아무리 어려운 협상이라도 대화를 통해 여야 간 타협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으로, 좌우명도 ‘해불양수(海不讓水ㆍ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였다. 1987년 개헌 협상에 민정당 측 대표로 참여해 야당과의 원만한 협의를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의 정책 비서로 정계 입문한 유의동 국민의힘 의원은 고인에 대해 “정치권의 갈등을 언제나 최소화하려 노력했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고인이 당시 여권의 ‘9룡’ 중 한명으로 뛰었던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고인은 2위 이인제 후보에게 불과 5표 차(1776 대 1771, 재검표 뒤 8표 차이로 확인) 뒤진 3위를 기록했다. 2위를 차지한 이인제 후보는 결선 투표에서 1위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탈당을 감행, 독자 출마했다. 정치에서 ‘만약’만큼 부질없는 게 없다지만, 고인이 2위를 했다면 ‘이인제 탈당’이 불가능했을 거란 분석이 다수설이다. 그럴 경우, 그해 말 대선이 어떻게 흘렀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고(故) 이한동 전 총리는 JP(김종필 전 총리)와의 오랜 인연으로 2013년 발족한 운정회(雲庭會) 회장을 맡았다. 운정회는 JP의 업적을 기리는 모임이다. 다만 “정치는 허업(虛業)”이란 JP의 말과 달리 고인은 “정치는 중업(重業)”이라고 했다. 이는 2018년 출간한 고인의 회고록 제목이기도 한데, “정치인은 아무나 함부로,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을 위해 취할 직업이 아니다”는 깨달음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은 2018년 6월 27일 오전 서울 송파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 영결식에서 이 전 총리가 조사에 앞서 인사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고인은 김대중(DJ) 정부 2년 차이던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로 활동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이 115석(총 273석)에 그치자 DJ는 ‘식물 청와대’를 극복하기 위해 17석이던 자민련과의 공조 복원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고인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는데, 헌정사상 인사청문회를 거친 첫 총리였다.

1년 후인 2001년 9월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통과되며 DJP 연합이 붕괴했지만, 고인은 당적을 유지한 채 총리직을 이어갔다. 이에 자민련은 당의 총재였던 그를 제명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고인은 이듬해 7월까지 총리 자리를 지켰지만, 이후부터 그의 정치인생은 내리막이었다. 2002년 말 하나로국민연합 소속으로 16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득표율은 0.3%였다.

이 전 총리의 별명은 그의 이름을 딴 ‘한또’ ‘단칼’ 등이다. 말술인 그는 폭탄주를 즐겼지만, 정계 은퇴 뒤엔 건강을 고려해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은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한길회’에 지난해 11월까지 참석했다. 현경대ㆍ김영진ㆍ전용원ㆍ이연석 전 의원 등이 한길회 멤버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가 9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한동 전 국무총리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이날 빈소엔 김 후보자를 비롯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사회 각계 저명 인사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9일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을 빈소에 보내 유족에게 조의를 표시했다. 유 실장은 조문 뒤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이) 우리나라 정치에서 통합의 큰 흔적을 남기고 지도력을 발휘한 이 전 총리님을 기리고, 유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해달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설명했다.

고인의 유족으론 아들 이용모 건국대 교수와 딸 지원ㆍ정원, 사위 허태수 GS그룹 회장과 김재호 동아일보ㆍ채널A 사장, 며느리 문지순 동덕여대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광진구 건국대병원, 발인은 11일이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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