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인사이트] 아직 살만한 세상

2021. 5. 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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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기자생활 30년 차다. 부조리를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시작했지만 ‘기레기’라고 싸잡아 욕을 먹다 보니 요즘은 명함 내밀기도 부끄러운 게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도 활자화된 글에 대한 반응이 오는 것을 보면 언론의 위력과 자부심을 새삼 느낀다. 시끄러운 정치·사회 뉴스에 신물 난 독자들이 국민일보가 다루는 따뜻한 뉴스에 격려전화를 해오거나 SNS를 통해 댓글을 남기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얼마 전 회사로 걸려온 전화도 그 사례 중 하나다. 베이비박스를 처음 만든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 얘기를 다룬 ‘역경의 열매’가 최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 25회에 걸쳐 연재됐다. 이 목사는 미혼모들이 아기를 낳은 뒤 키울 능력이 없어 버리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2009년 12월 교회 앞에 베이비박스를 설치해 지금까지 1874명의 아기들을 거뒀다. 이날 전화는 신문을 보니 이 목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물질적으로 돕고 싶다는 거였다.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그녀는 너무 바빠서 잠시 짬을 내 전화했는데 이 목사를 만날 필요도 없고, 이 목사 계좌로 돈을 보내줄 테니 계좌번호만 알아봐 달라고 했다.

교회 뉴스를 다루는 종교국에 근무하다 보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숨은 의인들이 많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밀알복지재단과 함께 진행하는 ‘기적을 품은 아이들’ 기사에도 십시일반 성금이 쌓인다. 1만원부터 3만원, 5만원, 수십만원에 이르기까지 장애아들의 사연을 읽은 독자들이 밀알복지재단을 통해 장애아 가정을 후원한다. 이 기사를 편집하는 회사 후배도 눈물을 훔치면서 사연을 읽고 후원하곤 한다. 지금은 코로나19로 해외출장이 어려워졌지만 월드비전, 기아대책과 함께 진행하는 아프리카 돕기 캠페인에도 많은 교회가 신문을 보고 동참한다. 현장을 찾은 목사·장로들이나 취재차 동행한 기자들은 궁핍한 아프리카 어린이들과 1대 1 결연하고 평생 후원자가 돼 돌아온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 부동산·주식에 이은 비트코인 광풍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힘을 보태는 익명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있으니 말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청지기로 살아가려는 목회자들이 많아서다. 13년4개월 동안 교인 1만3000명으로 일군 교회를 떠나 시골로 내려가며 자신을 철저하게 버려 달라고 했던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통해 30개 교회로 분립을 추진하고 있는 이찬수 분당우리교회 목사 등 우리 시대에도 존경받을 만한 목회자가 많다. 종교국에 3년가량 있으면서 이런 목사님, 저런 목사님을 많이 만나게 된다. 교인 2만명 이상의 대형교회 목사가 우리 회사가 주최하는 포럼에 설교하러 오면서 손수 운전하고 오거나 수행 목사나 장로도 없이 낡은 성경 한 권 달랑 들고 오는 것을 보면 존경스럽다. 10명 가까운 목사들을 호위무사처럼 끌고 다니는 어느 대형교회 목회자와 비교돼서다.

언젠가 사석에서 만난 박종순 충신교회 원로목사는 2010년 12월 은퇴하면서 ‘3나 원칙’을 지키려 한다고 했다. ‘나서지 말자’ ‘나불대지 말자’ ‘나대지 말자’가 그것이다. 조기은퇴한 뒤 다음세대 목회자들을 양성하고 미자립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정성진 거룩한빛광성교회 은퇴목사나 반세기 넘게 국내외 목회 현장을 누비다 9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후배 목사들에게 목회나눔 특강을 하고 있는 박조준 목사 등은 한국교계의 사표(師表)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건 목사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목사들 때문이다. 호텔에서 밥 먹게 될 일이 생기면 어렵게 사는 교인을 먼저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 이 정도 염치도 없는 목사라면 짠맛 잃은 소금에 불과하다.” 노 목사의 일침이 한국교회를 일깨우는 각성제가 됐으면 한다.

종교국 부국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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