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제주 관광객들이여, 이 목소리 좀 기억해다오
[김철관 기자]
체제와 이념의 폭력 속에 잊을 수 없던 제주4.3의 아픈 이야기와 영령들이 남긴 유품을, 사진과 시를 통해 출판한 책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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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고현주-허은실의 '기억의 목소리'리 표지이다. |
ⓒ 김철관 |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해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은 올해로 73주년이다. 현재 4.3행방불명자 수형인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고,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상태에서, 이 책의 의미가 한층 돋보인다.
"직업 나가기 전에 내가 밟고 다니는 제주 땅 처처에 누군가의 억울한 영혼이 묻혀 있는 것 같아서 또 빌었다. 땅을 밟고 걸을 때도, 나무를 만질 때도, 바다를 바라볼 때도, 곶자왈에 들어설 때도, 땅에 떨어져 있는 돌들을 볼 때도, 동백이 지고 벚꽃이 피어날 때도 그 풍경 속에 갇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두려웠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들어가면 갈수록 처참하고 슬펐다. 그래서 더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너무나 모순된 이 감정들이 난 아직도 낯설다." - 고현주 작가의 서문 중에서
제주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성산일출봉, 함덕해수욕장, 섯알오름, 다랑쉬오름, 정방폭포, 표선해수욕장 등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아름다운 공간들이 4.3 당시 집단 학살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저고리, 비녀, 영정사진, 놋쇠숟가락, 재봉틀, 놋화로, 궤, 데왁세기, 물옷, 망주석, 은반지, 그림, 사진, 맷돌, 혼례복, 다듬잇돌, 성경책, 엽서, 무명천, 사진, 한복, 떡틀, 요강, 놋쇠 항로와 촛대 등은 4.3유족들이 공개한 유품들이다. 학살현장에서 발굴된 얼레빗, 유해 발굴시 나온 꺾인 숟가락, 암매장 때 입고 신었던 상의와 고무신 등의 유품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4.3 때 아버지를 잃은 강은택(47년생)씨는 당시 세 살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98세이다. 48년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는 토벌대의 집단학살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년시절 입었던 짙은 분홍색 저고리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저고리 안쪽에는 일제강점기 정미소에 쌀을 담던 자루를 안감으로 사용해 당시의 생활상을 전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봉틀 질을 해 자식들을 키웠다. 저한테는 우리 어머니가 율법이었다. 우리가 이 재봉틀 때문에 살았다. 10대 때는 여기가 싫어 서울로 도망도 갔지만, 결국 돌아와 이 학살터 앞에 집을 지었다.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마주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 본문 중에서
강씨는 4.3은 팩트나 배상, 보상의 문제보다, 이 팩트를 어떻게 끌고 나가 역사에 남기느냐, 어떻게 이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을 달랠 거냐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쌀독에서 이 데왁세기로 쌀을 뜰 때 어머니 머리가 높으면 안심되고 허리가 굽어 뜰 때는 한숨이 나오죠. 언제 이걸 채우나 하고... 저는 4.3 때 죽창에 여러 번 찔러 피를 많이 흘린 뒤 빈혈 때문에 바깥 일을 못해 세탁소를 차렸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서 빚도 갚고 집도 사고 그래서 어머님도 안심하고 돌아가신 것 같다." - 본문 중에서
조정자(1956년생)씨의 부친은 기독교 목사였다. 일본 유학시절 보던 중국어로 쓴 신구약 성경 두 권이 유품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4.3의 경위와 전말을 육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1947년 모슬포교회에 목사로 부임하시고 1년 뒤 4.3을 겪었다. 4.3당시 사형선고가 내려졌는데 아버지 덕에 살아난 사람이 수 천명이다. 아버지가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린 이유인데, 당시 독립군 출신이었던 문형순 모슬포 경찰서장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내가 목숨 걸고 주민들을 자수하도록 설득하겠다. 죽이지 말라.' 그래서 합의를 받아 내고 경비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연을 했다. 그렇게 살려낸 사람이 3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 본문 중에서
저자 허은실은 4.3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토록 무자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라 대체 어떤 존재인가. 상상 가능치를 넘어서는 참혹 속에서도 끝끝내 살아지게 하는 삶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우리는 어디서부터 사람이고 어디까지가 삶인가."
이 책을 통해 제주4.3의 아픈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진실이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했다.
저자 허은실 시인은 2018년 제주로 이주한 후, 4.3 관련 증언을 기록하며 시를 쓰고 있다. 문명과 역사, 체제와 이념의 폭력 속에서 음소거된 목소리를 듣는 일, 문서가 누락한 이름들을 부르는 작업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쓰고 있다. 저서로 시집 <나는 잠깐 설움다> 산문 <내일 쓰는 일기>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서>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등이 있다.
고현주 사진작가는 2018년부터 제주 4.8유품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 '기억의 목소리'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4.3의 역사가 당대의 집단 기억으로, 문화적·시대적 상징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만드는 데 예술가로서 작은 역할이나마 하고 있다. 일곱 번의 개인전과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저서로 <꿈꾸는 카메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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