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균 칼럼] 미·중 신냉전서 한국이 승자되려면

임상균 2021. 4. 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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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5일 일본 닛케이지수가 하루 만에 10%나 급락했다. 세계 공산주의의 수장인 소련 스탈린이 사망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날 낙폭 10%는 역대 일본 증시 하락폭 4위에 해당할 정도의 패닉이었다. 이보다 더 많이 떨어진 날은 블랙먼데이, 글로벌 금융위기, 동일본 대지진 등 전대미문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였다.

스탈린 사망이 일본에 그토록 큰 충격을 준 이유는 한국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반대로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얼마나 큰 수혜를 입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D. 클레이턴 제임스는 저서 ‘맥아더전기’에서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병기창 역할을 하며 태평양전쟁 패전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 주둔 미군이 1950년 봄 6만명에서 반년 만에 25만명으로 급증했고, 1953년에는 주둔 유엔군 규모가 76만8000명까지 늘어났다. 일본에 설치된 각종 미군시설만 해도 2500개소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은 무기와 장비뿐 아니라 한국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했다. 1950년부터 5년간 구매된 물자의 금액이 17억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토요타자동차는 이를 계기로 글로벌 1위를 향한 길을 시작했다.

일본 과학사가인 야마모토 요시타카도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에서 “한국전쟁 특수야말로 일본 경제가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이라고 단언했다. 1950년부터 5년간의 전쟁 특수로 일본은 30억달러를 벌어들였고, 일본 기업들은 생산설비와 최신 기술을 도입하며 고도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전쟁의 약발이 끝나가던 1965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또다시 큰 호기를 맞았다. 이번에도 미군의 훌륭한 병참기지 역할을 하며 경제성장의 수혜를 가져갔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일본의 명목 GNP 성장률은 연평균 16.7%에 달했다. 한국전쟁 때 무기와 기계제조업이 컸다면 베트남전쟁에서는 중화학공업이 급성장했다. 특히 패전 이후 계속되던 무역수지 적자가 1965년 흑자로 돌아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해 맞붙었다. 치열한 패권 다툼은 군비 경쟁을 넘어 우주 경쟁으로 확장하면서 인류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갔다. 제조업과 과학기술이 발전한 국가는 냉전의 혜택을 즐길 수 있었다.

1989년 12월 초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마주 앉은 몰타회담으로 냉전은 종식됐다. 며칠 뒤부터 일본 주가는 급락세로 돌아섰고, 초호황을 구가하던 일본이 장기 불황에 진입하는 신호탄이 됐다. 미·소 냉전에서 일본이 얻은 이익을 감지할 수 있다.

이제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패권을 놓고 맞붙었다. 미·소 간이 군사적 패권 경쟁이었다면 이번은 경제전쟁이고 기술전쟁이다. 미·중 신냉전은 그래서 한국에는 큰 위기이자 기회이다. ‘전략적 모호성’ ‘경중안미’ 등 소극적 중립만이 국익 극대화의 길인지 점검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반도체, 배터리 등 기술전쟁의 핵심 무기를 쥐고 있다. 어느 한쪽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을 양쪽 모두 우리를 원하도록 만드는 전략적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주간국장 sky221@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6호 (2021.04.28~2021.05.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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