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 없었던 일본, 조선과 달리 성리학에 비판적"

유성운 2021. 4. 2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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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유학사』 낸 강지은
"실학은 성리학 반성의 산물 아닌
그 안에서 꾸준히 진행된 학문"
강지은 교수

17세기 일본의 성리학자 야마자키 안사이는 제자들에게 “만약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맹자를 부장으로 삼아 일본을 공격한다면 공맹(孔盟)의 도를 배운 이들은 어떻게 해야겠는가?”라고 물었다. 제자들이 당황해하자 그는 “무기를 쥐고 그들과 일전을 벌여 공맹을 사로잡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이것이 공맹의 도”라고 답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에게 멸망한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북벌론(北伐論)이 한창 논의되고 있었다. 같은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두 나라의 인식은 이렇게 달랐다.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사진 푸른역사]

17세기는 조선에서 성리학적 질서와 세계관이 더욱 강화된 시기다. 장자 상속, 노비제, 남녀 차별 등이 이때 굳어졌다. 반면 성리학의 원조 중국에선 신분 질서를 탈피하고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이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 후 조선을 통해 성리학을 수입한 일본도 이 당시 주자성리학을 비판하고 자국을 중국(中國)으로 여기는 시각마저 나타났다. 조선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며 자부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

신간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사진)는 17세기 조선에서 성리학이 한층 강화·발전되는 양상을 다룬 교양학술서다. 조선이 ‘성리학 월드’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 강지은 국립대만대 국가발전대학원 부교수를 25일 e메일로 만났다.

Q : 17세기 성리학은 왜 강화했나.
A : “임진왜란 시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패전 소식을 접하며 "전쟁으로 인해 윤리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 "조정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하도록 고무하는 것이 관건이다” 등의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이런 생각이 전후 국정 운영과 각 사회에 자연스레 반영됐다고 본다. 반면 국방력 강화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론 한심해 보이지만 당시 명나라 원군이나 의병 활동 등을 감안하면 그들이 틀렸다고만 일갈하기도 어렵다.”

Q : 같은 시기 일본에선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양명학도 수용했다.
A : "조선 양반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해야 했고, 이를 통해 관직을 얻고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었다. 주자가 남긴 책만 공부하면 되는 사회였다. 반면 일본은 과거제가 없었다. 심지어 무사의 도(道)와 다르다고 배척당했다. 유학에 관심 있는 무사는 밤에 몰래 경서를 읽었을 정도다. 유학의 필요성이 인정받지 못하니 유학과 사회적 이익이 만나는 유용성을 추구했고 ‘독창적’인 해석도 했다. 또 성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양명학 등 다른 유학 사상도 들어와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

Q : 18세기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 아닐까.
A : "주자는 행위의 결과를 우선하여 관심을 갖는 공리주의를 비판했다. 옳음(義), 이치(理)를 중요시했다. 그런데 오늘날 말하는 조선 후기 실학의 특성 안에 공리주의가 포함되기도 하고, 좋은 것은 다 실학으로 귀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학(實學)’은 조선에서 학자들 사이에 꾸준하게 거론된 용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수기만 하고 치인을 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고민들이다. 실학은 18세기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게 아니라 성리학 안에서 꾸준히 진행된 학문이다.”

Q : 조선에선 독창적인 성리학 연구가 없었나.
A : "17세기 일부 ‘정설’과 다른 목소리를 자꾸 반주자학적인 움직임으로 해석하려고 하는데 일본의 영향이 있다고 본다. 일본 식민당국이 ‘독창성’을 강조하면서 조선 유학을 깎아내리니 이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정밀한 해석보다 독창성을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조선 유학사에서 독창성이 키워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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