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꿈 접고 '주거권 투사'가 되기까지..

문세경 2021. 4. 2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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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 인터뷰] 이원호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문세경 기자]

 서울시 보궐선거가 끝난 다음날 인터뷰 하고 있는 이원호. 참담한 결과에 다른때보다 초췌해 보였다.
ⓒ 문세경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서울과 부산의 보궐선거가 끝났다. 예상대로 그가 당선되었다. 눈앞이 캄캄하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때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한국의 도시 개발정국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활동한 이원호(46)가 생각났다. 이원호는 2009년, 용산참사 발생 후 용산참사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현재는 비상근 활동). 4월 8일 오후 7시, 불광동 인근에서 그를 만났다. 

"용산참사는 필연적 사건"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빈곤운동과 철거민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실제로 학생운동도 철거민 싸움과 개발문제에 연대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단절되거나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용산참사는 단순히 어쩌다 일어난 사건이 아니에요. 필연적인 사건이었죠. 그 이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이명박 서울시장이 도심 광역개발을 추진했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뉴타운 사업'인데 여기에 운동사회가 제대로 대응을 못 해서 생긴 참사예요." 

대학에서 '도시빈민 선교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한 이원호는 1990년대 중반, 재개발 철거지역이었던 서울시 용산구 신천동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철거 싸움을 했다. 처음이어서인지 용역깡패들이 무서웠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용역깡패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2007년에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당시에는 뉴타운 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뉴타운 지역 세입자를 만나 교육하고 조직하는 일을 하고 있던 이원호는 2009년 1월 21일 용산참사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건이 터지고 1년 동안 현장에 있었어요. 희생당한 분들의 장례를 치르는데 355일이 걸렸어요. 당시에 경찰폭력도 심했고, 여러가지 물리적 어려움이 많았죠. 그런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어요. 유족과 피해자들이 남일당에 있으면서 이명박 정권과 싸우고 그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단결하고 지내다가 장례합의를 하고 1년 만에 장례를 치렀어요.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활동가들은 어디로 가든 활동의 연장선인데 유족들은 1년 동안 완전히 다른 삶을 경험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라 힘들어하셨어요. 겉으로는 괜찮아보였지만 트라우마가 워낙 커서 생존한 철거민 중에 갑자기 자살하신 분도 있어요. 그때 저도 놀랐지만 다른 분들도 많이 놀랐어요."

용산 참사는 명백한 국가폭력으로 발생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는 철거민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범죄자로 만들었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가서 생존권을 요구했는데 주검이 되어 돌아온 철거민, 죽음도 억울한데 '범죄자'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온 세월을 어느 누가 보상해 줄까. 

그 일을 1년 동안 옆에서 보고 겪었던 이원호의 마음에는 어떤 생채기가 남았을까. 그 또한 희생된 분들과 다르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살았으리라 짐작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2019년에 용산참사 10주기를 준비하면서 (용산참사의) 한 챕터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나도 밝혀진 게 없어요. 여전히 2009년에 갇혀 있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책임자 처벌은 못했지만 10년 동안 유가족과 생존자들과 손잡고 경찰조사위원회와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었거든요. 그렇게 진상규명의 1라운드를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김석기(용산참사 당시 경찰청장)가 총선에 출마를 하는 바람에 거기에 대응하느라고 10년 싸움을 마무리 못 했어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양상인데, 거대한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똘똘 뭉쳐서 싸우잖아요. 그런데 적이 꿈쩍도 안 하면 피해자들은 지치죠. 용산사건도 그런 과정이 많았어요. 내부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고. 저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율하고 설득하느라 힘들었죠."
 
 4월 1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오세훈 후보의 용산참사 막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용산참사 현장에서 열고 있다(맨 왼쪽이 이원호).
ⓒ 이원호
 
목사의 꿈을 접은 이유

이원호의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다. 아버지는 사북에서 광부로 일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모범생이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선생님을 욕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순진한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 번도 서울에 가보지 못한 촌놈이었다. 목사가 되고 싶어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도시빈민선교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다른 세상을 만났다. 상상해보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났고, 재개발로 쫓겨난 사람들을 만났다. 목사가 된다고 그 사람들의 삶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목사의 꿈을 접고 '투사'가 되었다.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달동네 담장 무너진 거 쌓고 아이들 학습 도와주는 봉사 동아리인 줄 알았어요. 운동권 동아리인 줄은 몰랐던거죠(웃음). 재개발 지역의 공부방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아이들하고 공 차다가 공이 밑으로 굴러가면 산비탈 따라서 공 주우러 가는 게 일이었어요. 재개발 때문에 없어진 공부방이 많았어요."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지 8년 만인 2017년, 한국도시연구소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도시연구소는 빈민운동 동아리 활동할 때 알고 있던 곳이다. 이원호가 대학 때 알던 도시연구소는 활동가들을 교육해서 파견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한국도시연구소로 전환해 재개발 이슈와 관련된 정책을 만들고 있다. 그곳에서 4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6월부터는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로 복귀할 예정이다. 

4월 7일 서울시 보궐선거 결과를 본 이원호는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2009년,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 강해요. 재개발, 재건축을 활성화할 조짐이 확실하고 다시 뉴타운 삽질의 시대로 돌아가는 거죠. 용산참사가 벌어지기 전에 대규모 도시개발을 통한 부동산 욕망이 들끓고 있었는데 그 정점에서 용산참사가 터졌고, 2009년 이후에는 부동산 침체기였어요. 

이번 서울시 보궐선거에서 오세훈씨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전면철거에서 도시재생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는데 도시재생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다시 전면철거형 재개발의 시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지역을 개발한다는 것은 개발구역이 정해지는 거잖아요. 이 개발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철거민만의 문제라고 치부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2009년에 용산참사가 벌어진 후 많은 사람들이 용산에 왔어요. 그때 반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개발문제가 개발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보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이거든요. 지역단체들의 기반도 상실되는 과정이고요. 여기에 운동사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철거민운동에만 머물렀다는 게 한계였어요. 

도시개발의 역사를 보면 원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주택공급을 통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주겠다는 거거든요. 그동안의 도시개발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은 재정착하지 못하고 10%, 15%만 정착을 해요. 나머지는 다 쫓겨나는 거죠. 그러면 주택공급이 늘어서 집 없는 사람이 집을 갖게 되었느냐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여전히 주택소유율은 그 전과 동일한 비율인 50~60%인 거예요. 새로 지은 집은 이미 집이 있는 사람들이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사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투기목적으로 활용되었던 개발의 역사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주거권의 박탈을 가져왔다고 봐요.

2006년, 2007년에 운동진영이 뉴타운 대응을 제대로 못해서 용산참사라는 사건이 터졌는데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 다시 재개발, 재건축 조짐이 보이는 이 국면에서는 제대로 대응해야 해요. 그렇게 못해서 또 끔찍한 사건이 터지면 안 되잖아요. 저는 두려워요."

순하고 착한 이원호의 입에서 '두렵다'는 말이 나오자 덜컥 겁이 났다. 그동안 겪었던 참사를 다시 겪지 않을까하는 불길함이 스쳤기 때문이다.

"주거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용산참사가 터지고 집회에 갔을 때, 이원호가 사회를 봤던 기억이 난다. 이원호는 보기 드문 훈남이었다. 거기다 꽤 차분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집회에 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어디서 그렇게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믿기 힘들 정도로 단호하게 구호를 외쳤다. 그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 수 있을까 하고 흑심(?)을 품었던 기억이 나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느덧 용산참사가 터진 지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이원호는 당시에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였던 B씨와 결혼을 했다. 벌써 결혼 7년차라고 한다. 결혼식에도 못 가서 미안했던 나는 결혼생활은 어떤지, 둘 다 활동가인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에 행복주택으로 이사했어요. 행복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조건을 보니까 결혼한 지 7년차인 사람도 된다고 해서 신청했어요. 결혼 7년차인 저희가 법적으로는 아직 신혼인가봐요. 역세권이고, 숲세권이에요(웃음). 

저희는 고양이 두 마리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당뇨에 걸려서 당뇨 주사를 시간 맞춰 놓아야해요. 그래서 인터뷰 끝나고 빨리 가봐야 해요. 활동가들의 경제적인 문제는 다 비슷하죠. 저희는 많이 쓰지 않으니까 그럭저럭 버틸만해요. 고양이한테 돈이 좀 들어가요."

쑥스러움이 많은 이원호는 개인적인 질문에는 단답형으로 말했다. 활동가로서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냐고 하자, "잘못된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 하지만 조금씩 바뀌는 것들을 보면 이 삶(활동가의 삶)이 결코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단다. 그리고 아껴놨던 에피소드를 꺼냈다. 
 
 2019년 6월. 쪽방주민 주거권 보장 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이원호.
ⓒ 이원호
 
"2008년에 왕십리 뉴타운 철거 싸움 할 때예요. 세입자들 조직하는 사업을 했어요. 지역에 있는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 모임을 했어요. 첫 주에는 한 10명 정도 모였어요. 우리는 매주 모임을 할 거니까 사람들을 더 데리고 오라면서 유인물을 나눠줬어요. 그런데 몇 주 만에 사람들이 100명 넘게 모였어요. 나중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청계천 다리 밑에서 모였어요. 당시에는 세입자들이 재개발지역 세입자 대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예요. 뉴타운 사업을 하면 우리 동네가 좋아지는 건지 알고 개발에 찬성을 한 거죠. 막상 나갈 때가 되면 인식을 하죠. '나가라고 나가는 게 아니구나' 하고.  

한번은 철거대책위 사무실에 용역들이 쳐들어와서 저하고 주민들이 용역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어요. 그런데 힘으로 버틴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폭행 당하고 맞으면서 버텼는데 경찰이 왔고, 용역들은 도망갔어요. 그때 제가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 도로를 점거하자"며 도로로 나갔어요. 도로에서 한 시간가량 연좌농성을 했어요. 그때 주민 20여 명과 제가 연행됐어요. 이때 주민들이 뉴타운 문제에 눈을 뜬 거예요. 왕십리 철거민들이 많은 역할을 했어요. 철거민들이 언론에 인터뷰하면서 '이건 나라도 아니다'며 말했는데 그게 북한선전매체에 올라간 거예요. 북한은 이 영상을 '남한은 이렇게 살기 힘든 동네다'라며 역이용하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일화죠."

웃긴 얘기지만 결코 웃기지 않은 에피소드를 듣자니 씁쓸했다. 고양이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이원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쏟아놓고 총총히 떠났다. 

"한국사회에서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구호는 단순히 철거민들과 집 없는 홈리스들의 구호라고 보잖아요. 주거권이 굉장히 낯선 권리고,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고, 재테크와 관련된 문제로 치부되어 있어서 그래요. 주거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요. 그래서 이것이 나의 권리라는 것을 깨닫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주거권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을 공공주택으로 개발하기로 한 것은 그동안 주민들이 끊임없이 요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요. 참 잘 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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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서울 청각장애인 문자통역지원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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