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젊은' 사찰이 많은 이유, 이겁니다
[차노휘 기자]
▲ 대평마을 어가 |
ⓒ 차노휘 |
올해는 제주4·3항쟁 73주년이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에 참석한 제주도민에게 경찰이 발포한 사건에 항의하는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는 시기까지의 기간 동안 국가 공권력에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 당시 제주 사찰 또한 거의 전소되었다. 사찰 피해 시기는 1948년부터 1949년에 걸쳐 주로 이루어지는데 토벌대의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던 초토화 작전 때였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도 물론 컸다.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피해는 제주 불교의 오랜 후유증이 되었고 건물 또한 재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제주 사찰 건물 나이는 다른 지역에서 비해서 비교적 젊다.
▲ 약천사 경내 너머 서귀포 앞바다 |
ⓒ 차노휘 |
약천사는 사철 마르지 않은 약수가 솟는 곳이어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 당시 일제에 끌려갔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스님이 출소 후 몸조리를 위해 한 동안 머문 곳이며 1960년대 유학자가 신병 치료차 굴속에서 1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꿈에 약수를 받아 마신 후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는 안팎의 화려함으로 그 소박함을 찾아볼 수 없지만 경내에서 바라보이는 바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인근 약수터에서 약수 한 사발 들이키고는 올레 화살표를 따라 절을 나섰다.
기억 정치
이른 아침부터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날씨 또한 완벽했다. 새벽에 내린 비로 온 초야가 이슬을 먹은 것처럼 싱그러운데 그 위로 나른한 햇살이 살짝 앉아 있었다.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중산간에 위치한 절 승려들이 불상이나 탱화를 등에 업고 피난을 했다는 이야기도, 자주국가건설을 주창하며 제주사회활동에 활발했던 승려 이일성을 산 채로 바다에 수장해버렸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한 방울의 이슬처럼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기억에서 증발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 베릿내오름에서 내려오며 |
ⓒ 차노휘 |
최근, 기억은 전형적인 정치적 현상으로 간주되어 연구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특정 집단이 과거에 경험한 집단적인 학살, 즉 제노사이드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그 집단을 행동에 동원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텔레비전, 영화, 박물관, 교과서, 무대공연 등 이러한 '기억 텍스트'를 통해 특정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를 하버트 허쉬는 '기억의 정치'라고 했다.
▲ 대포주상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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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주4·3 때에도 어김없이 공연을 위해 제주도로 떠나는 지인에게 물었다. '제주4·3사건'과 '제주4·3항쟁'이 어떻게 다른지. 지인은 곧장 연락을 해왔다.
"'제주4·3'을 중립적 사건이라서 용어를 붙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사건이 아니라 민중 항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사건'이라고 하는 집단은 보수정권이나 이승만 정권을 이양한 이들이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려는 것에 불과해.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제주4·3민중항쟁이라고 했어.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주4·3은 민중항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민학살이 몇 년 간 지속되었던 국가권력의 엄청난 범죄였다는 거야. 킬링필드보다 더 끔찍한 범죄… 제주4·3민중항쟁과 제주4·3사건의 이념 논쟁 이면에는 숨겨진 몇 년 간 지속된 제주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거야…"
이렇게 기억의 정치의 장에서는 서로가 한 '과거'를 부르는 명칭부터 다르다. 서로의 이념 대립으로 희생된 존재들을 또 희생시키는 현실을 반복 재생할 뿐이다.
일상의 행복
▲ 중문 스타벅스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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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문에 있는 꽤 특이한 스타벅스 건물을 지나서 예래마을로 가는 2차선 도로 가를 걸을 때는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한 400m 즈음되는 거리인데, 씽씽 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과 소음으로 그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 대평포구에 있는 박수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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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는 군산과 안덕계곡, 서쪽으로는 예래동 월라봉과 박수기정 등이 감싸고 있어서인지 제주4·3의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던 이곳. 박수기정 아래에 설치된 제8코스 종점 스탬프를 찍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 마을로 들어섰을 때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을 일구고 있는 주민들의 등허리에서, 아직까지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는 지붕 낮은 촌가에 그려진 벽화나 작은 소품을 내걸고 있는 소박한 상점에서, 이곳 주민들의 여유로움을 보았다. 오전 8시부터 걷기 시작해서(해찰 부리는 시간도 많았지만) 오후 3시가 지나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이 일상의 평화로움에 절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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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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