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고증 거친 상상화일 뿐인데 '표준영정' 정해야 하나

2021. 4. 2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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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표준영정 공개, 궁예도 추진
'일호불사' 전통에 어긋나지만
정부, 역사 교육 위해 존치론 주장
획일화 된 허구 이미지 고정 위험


역사적 인물의 표준영정 제도 논란

제100호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권오창의 단종 어진. [연합뉴스]

얼마 전 100번째 국가 지정 표준영정이 나왔다. 비운의 소년왕 단종(1441~1457)의 어진(御眞)인데, 강원도 영월군이 권오창 한국화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다. 영화와 TV드라마에서 단종 역의 배우가 앳되고 갸름한 얼굴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어진의 성숙하고 원만한 얼굴이 다소 낯설다. 하지만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의 묘사와 단종의 조상인 태조의 어진을 연구했고, 특히 단종을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되 가까운 혈족이었던 세조(수양대군)의 어진 초본을 참고했다고 한다. 태조와 세조의 어진은 조선 왕의 실제 얼굴이 반영된 몇 안 되는 현존 그림이다. 생존 당시에 그려진 도사(圖寫)본이 아니라 그것을 후대에 정교히 베낀 모사본이다.

단종의 실제 얼굴이 수백 년 후 배우 얼굴보다는 그림 속 숙부 얼굴을 닮았을 확률이 높긴 할 것이다. 하지만 친족 간에 전혀 닮지 않은 경우도 흔하지 않은가. 결국 단종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상의 영역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분 상상에 기댈 수밖에 없는 초상화는 천차만별로 나올 수 있는데 그중 하나를 ‘표준’으로 지정하는 것이 옳을까? 상상의 초상화는 우리 조상이 중시한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 즉 ‘털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의 법칙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데 말이다.

‘일호불사’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직한 극사실주의 정신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강관식 교수에 따르면, 원래는 좀 다른 맥락이라고 한다. 중국 북송시대 유학의 대가 정이(1033~1107)가 ‘제사에 영정을 쓰려면 털 한 올도 다르지 않은 초상을 써야 다른 사람에게 제사 지내는 게 되지 않으며 (실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영정 대신 신주를 써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비잔틴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 벌어진 성상파괴운동과 비슷한 맥락이다. 오묘한 신성(神性)을 한낱 사람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성상파괴운동에 깔린 생각이고, 한 인간의 인성(人性)조차도 하나의 그림으로 완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게 유학자 정이의 생각인 셈이다. 이렇게 ‘일호불사’가 영정 자체의 한계를 가리킨 유교 제사 철학이든, 또는 조선 극사실주의 초상화 정신이든 간에, 상상의 초상화를 표준영정으로 지정해 유교적인 사당 제사용으로 쓰는 것은 ‘일호불사’ 전통과 꽤나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나도 단종 같은 드라마틱한 역사의 주인공들 얼굴이 궁금하고 그 얼굴을 이미지로 재현했다면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된다. 게다가 단종이 유배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영월군에서는 그가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오랫동안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어 왔고, 민중의 비애와 염원이 담긴 무신도로 많이 그려져 왔다. 단종은 영월 일대의 사당과 절·성황당에서 유교와 무속을 넘나드는 융합적 형태로 기려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좀더 고증을 잘 살린 번듯한 어진으로 단종을 재현해 보고자 하는 소망이 있을 수 있고 또 실현될 수 있다.

제1호 표준영정인 월전 장우성의 충무공 이순신. [중앙포토]

문제는 이 어진이든, 다른 그림이든 ‘일호불사’의 그림도 아닌 것이 ‘표준’이 될 수 있는가이다. 나는 지난해 10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던 박양우 전 장관과 인터뷰할 때, 표준영정 제도 자체를 폐지할 의향이 없는지 물은 적이 있다. 이때 장관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지역과 관련된 역사 인물을 기리거나 관광에 활용하기 위해 영정을 제작해서 사당에 봉안하려는 지자체의 수요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단종 표준영정은 매년 개최되는 영월 단종문화제에 활용될 예정이다. 표준영정 제도는 각 시대에 맞는 복식 고증이 핵심인데, 만약 고증이 잘못된 경우 사당 참배객이나 홍보물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역사교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표준영정 제도는 사학자·고고학자·복식 전문가·미술 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자문을 제공해서 영정을 그리는 작가가 고증 오류를 최소화하도록 돕는 제도다. 또한, 전통 초상화 기법 발달과 복식 연구에 기여하는 순기능이 있다. 여기에다 지자체의 지속적인 수요가 있기 때문에 표준영정 제도를 존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고증과 전통 초상화 양성에 관한 부분은 특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고증 과정에서도 여러 학설이 충돌할 수 있고 연구결과가 쌓이면서 한때 정설이었던 고증이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표준영정 제도만이 전통 초상화를 양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표준영정은 역사인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적 해석과 상상을 억압하고 획일화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표준영정 사용을 의무화하지는 않기 때문에 예술 행위를 표준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표준’이라는 타이틀은 하나의 권위가 되고, 심지어 표준영정을 역사인물의 생존 당시 초상화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다.

성상파괴운동을 했던 이들이 걱정했던 것은 성상이 한없이 크고 깊은 신성을 대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객전도로 그 성상 자체가 신으로 섬겨지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위인의 표준영정이 주객전도로 위인의 얼굴 자체로 받아들여져, 다른 그림이나 영화에서 위인의 묘사가 표준영정과 크게 다르면 비난이 나오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3년 최초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월전 장우성의 충무공 이순신 영정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영정처럼 홀쭉하고 지적인 얼굴이 아닌 이순신을 보면 당황하지 않는가.

국교가 따로 없는 대한민국에서 민족주의가 국교 같은 신성불가침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민족적 영웅의 표준영정은 일종의 성상이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성상 같은 지위 때문에 영정이 강력한 권위를 누리다가 잃어버리기도 한다. 월전의 충무공 영정은 월전의 친일 논란 때문에 표준영정 해제 신청이 들어와 해제 여부를 문체부에서 심의 중이다. ‘성상’의 제작자에게는 종교적 순결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월전의 일제강점기 총독부 후원 전시 참여가 과연 적극적 친일매국 행위냐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작한 표준영정 박탈이 주장되고 논의되는 것이다.

한편 표준영정 제도 존치와 관련한 문체부 입장에서 “지자체의 수요”와 “관광”이라는 부분도 흥미롭다. 민족주의와 더불어 현대 한국을 작동시키는 주요 원리인 자본주의가 표준영정 제도에도 함께 작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원도 철원군이 궁예 표준영정 심의를 신청했다고 문체부가 확인했다. 20년 전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김영철 배우가 열연한 궁예의 장면들이 최근 몇 년간 인터넷 밈(meme)으로 인기를 끌었고, 특히 “누구인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가 코로나19와 더불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니, 궁예 영정은 드라마와 닮았건 정반대이건 관심을 끌 것이고 지역 홍보와 관광산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궁예의 관심법을 동원하더라도 그의 얼굴을 ‘일호불사’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러니 다시 묻게 된다. 영정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표준영정 제도가 과연 필요한지 말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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