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괴질.. 실종 아동.. 공포의 근원은 '인간'이었다

2021. 4. 22.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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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창비, 184쪽, 1만4000원
장르문학이라는 말의 아이러니에 대한 갑론을박은 이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장르(genre)는 프랑스어를 우리식 발음대로 쓴 것인데, 본래 뜻은 문학 양식의 갈래 그러니까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으로 나뉘는 기본형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장르라고 함은 그야말로 특정 장르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된다. 일부 서점에서는 장르소설을 소설 시 에세이로 짜인 문학 분야와 구분해 따로 운영한다.

아르헨티나 여성 소설가 사만타 슈웨블린은 현대 중남미 문학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지난달 출간된 ‘피버 드림’은 국내 소개되는 그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이다. 환경재앙의 공포를 독창적인 미스터리 기법으로 그려냈다. 게티이미지 제공

예를 들어 한 인터넷 서점은 장르소설을 추리 미스터리 소설, 라이트노벨, 판타지 환상 문학, 과학소설, 호러 공포소설, 무협소설, 액션 스릴러 소설, 로맨스소설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여기에 선을 긋고 나란히 서 있는 소설들을 이른바 ‘순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순문학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문학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만큼이나 어렵다. 누군가는 미학적 가치를, 누군가는 관습과 전통을, 누군가는 시스템과 구조를 말하겠지만 위 서점을 반례로 들자면 추리 미스터리 판타지 환상 과학 호러 무협 액션 스릴러 로맨스가 아닌 무언가가 장르소설이 아닌 그냥 소설이 된다. 인간사의 재미있는 가지는 모조리 쳐내버리고서 매끈하고 무뚝뚝한 기둥을 쓰다듬고 끌어안으며 인간의 본질이니 세계의 구조니 하는 것들을 찾는 셈이다. 기둥이나 가지나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하나의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편혜영 작가는 2017년 ‘셜리 잭슨상’을 수상했다. 영화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문학 또한 최근 해외에서 성과와 인정이 눈부신데, 편혜영 작가 또한 이국의 눈 밝은 이들에게 그 진가를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상 이름이 낯익다. 알다시피 셜리 잭슨은 고딕 호러 소설의 선구자이자 대작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 ‘힐 하우스의 유령’은 스티븐 킹의 역작 ‘샤이닝’에 영감을 줬으며 같은 이름의 드라마로 제작·공개돼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장르소설 작가인 셈이다. 편혜영은 (우리식으로는) 결코 장르소설 작가로 불린 적이 없다. 셜리 잭슨과 같은 활동이 우리나라에서 있었다면 그 작품은 (역시 우리식으로) 장르소설로만 불렸을 것이다. 이쯤에서 자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 장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뭔가. 소설이 뭐기에…. 우선 그저 읽음으로써 답을 찾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스무 번’은 기성 작가가 제도권 문학에서 발표한 단편을 묶어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한 소설집이지만, 그런 세상사 재미없는 가지를 쳐내고 나면 무엇보다 이야기라는 기둥이 남는다. 유령이나 괴물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셜리 잭슨의 후예답게 불안한 심리와 불안정한 상황에서 오는 공포는 유령이나 괴물이 주는 그것 못지않다. 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에서 옥수수밭은 목가적 전원이 아닌 불안과 공포의 진원지이자 은신처가 된다. ‘호텔 창문’의 인물들은 미필적 고의와 순전한 우연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두려워한다. ‘리코더’에서 실종의 원인은 어렴풋하나 처참했던 과거의 사건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미래의 끝’에서 유년시절은 노스탤지어가 아닌 끝나버린 미래가 가까스로 현존했던 위기의 순간일 뿐이다. 각 단편에는 약간의 미스터리와 추리가, 공포와 스릴러가 있다. 문학을 무엇이라 정의하든, 그 또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스무 번’에 이어 ‘피버 드림’을 읽는다. 편혜영과 마찬가지로 셜리 잭슨의 후예임을 인증받은 사만타 슈웨블린의 장편소설이다(그 또한 셜리 잭슨상을 수상했다). ‘피버 드림’의 공포는 보다 본격적인 동시에 흐릿하다. 원인 모를 병과 실종된 아이는 본격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대화로만 이뤄진 독특한 진행은 사태의 전말을 뒤로 숨긴다. 서사 전략의 낯선 방해를 무릅쓰고 책에 집중하면 공포를 일으키는 벌레의 원인은 결국 초자연적 현상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된다. 죽음과 질병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과, 아르헨티나 시골에서의 독극물 과용이라는 현실이 어긋나는 대화에서 흡사 재빠르고 으스스한 유령처럼, 제 모습을 비추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소설은 끝내 그것을 말하지 않기를 택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방식의 보여주기가 된다. 그 보여줌은 특정 장르가 아니다. 인간사 재미있는, 읽어야 할, 가치 있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스토리와 플롯, 그 자체다.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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