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종이에 잉크 흩뿌려..'수묵' 느낌의 서양화

2021. 4. 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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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서예에서 영감 얻은 로버트 마더웰

뉴욕이 제2차 대전 후, 파리를 제치고 세계 미술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있어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선도적인 역할을 한 잭슨 폴록이 그 유명한 뿌리기 그림의 다채로운 전개를 위해 종이에 수채와 잉크를 사용해 아시아 전통의 수묵화 기법을 실험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물론 무의식의 흐름을 중시하기 위해 유럽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개발한 자동기법(automatism)의 기여도 컸지만, 수묵화나 서예 역시 중요한 예술적 영감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폴록 외에도 클라인을 비롯한 당대 많은 예술가들이 아시아 문화와 사상에서 영감을 찾았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1915~1991년)이다.

‘에스파냐 공화국에 바치는 비가(Elegy to the Spanish Republic, 1967년)’. ‘바스크 비가(Basque Elegy)’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2008년 11월 12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260만달러(약 29억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마더웰을 대표하는 ‘에스파냐 공화국에 바치는 비가’ 연작 중 한 점을 보자. ‘바스크 비가(Basque Elegy, 1967년)’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3m가 훌쩍 넘는 대작이다. 2008년 11월 12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260만달러(약 29억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이토록 높은 완성도의 작품은 현재라면 1300만달러(약 150억원)를 호가한다.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 당한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은 많은 예술가에게 정치적 발언을 하게 만든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스페인을 초토화하고 결국 프랑코가 권력을 거머쥔 이 비극적인 내전은 마더웰에게도 ‘스페인의 죄수(Spanish Prisoner)’ 또는 ‘비가(Elegy)’ 연작 제작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 초기 연작에서 보이던 모든 요소가 무르익고 비극적 사건에 대한 화가의 명상이 성숙하면서 발전한 것이 ‘에스파냐 공화국에 바치는 비가’ 연작이다.

이 연작의 최초 형태는 1948년에 시작한 잉크 드로잉에서 비롯됐다. 한 편의 시를 위한 삽화를 구상하면서 그는 세 개의 기둥과 타원형이 들어간 드로잉들을 그렸는데, 흑백으로 출판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색채를 검정 잉크로 제한했다. 당시 가깝게 어울리던 스페인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로베르토 마타(Roberto Matta, 1911~2002년)가 소개한 심리적 자동기법(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 의도를 제거한 채, 손이 가는 대로 붓질하는 방법)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이 흑백 드로잉에는 아시아 수묵화와 서예의 지대한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더웰은 그림 공부 이전에 스탠퍼드와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다. 당대 서양의 젊은 지성인 사이에는 불교와 아시아 문화가 유행처럼 크게 번졌고, 예술을 지향하던 진보적 성향의 그가 이를 접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측면은 언급되지 않을까.

일본 종이에 잉크로 그린 600점에 달하는 드로잉들로 구성된 ‘서정적 모음곡(Lyric Suite)’의 한 점. 1965년작.
사실 그는 선불교 회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중반 여러 해 동안 ‘서예’라는 제목의 많은 드로잉과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일본 종이에 잉크로 600점에 달하는 드로잉을 그리면서 자유로운 붓질을 연마했다. ‘서정적 모음곡(Lyric Suite)’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누가 봐도 수묵의 느낌을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돌연 그는 1969년부터 아시아의 영향을 전면 부인하며, 자신의 드로잉은 전부 자동기법에서 온 것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 추상미술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정치적인 이슈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

‘바스크 비가’는 마더웰이 ‘서예’라는 제목의 드로잉을 그리던 1967년에 제작된 추상화다. 검정 수직 기둥들과 타원형 형태는 각각 남성과 여성의 성기로도 해석되며 이는 나아가 음양으로 이뤄지는 우주 만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흑백의 대조는 죽음과 삶, 고통과 기쁨의 순환을 상징한다.

단순히 서예나 불교 정신으로만 그의 작품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는 강력한 건축적 요소와 구축적인 구조가 있는데, 이는 아시아의 서예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는 요소다. 화면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대범한 수직의 검정색 기둥 형태와 타원형이라는 기하학적 구조, 검정과 초록의 묵직하면서 경쾌한 리듬 등 깊고 풍부한 색조의 조화를 통해 그는 자신만의 대담하고 세련된 구성의 추상화를 창조했다.

‘열린 연작 넘버 103: 네모난 큰 푸른 색(Open No. 103: Big Square Blue, 1969년)’. ‘열린 연작’ 가운데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된 다. 2017년 11월 16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300만달러(약 33억원)가 넘는 금액에 낙찰된 바 있다.
‘에스파냐 공화국에 바치는 비가’ 연작 이외에도 196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열린 연작(Open Series)’이라는 단색화에 가까운 색면 추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바스크 비가’에서 보이는 전체적인 질서와 명확하게 정의된 직선적 형태는 이미 ‘열린 연작’으로의 이동을 암시한 것인지 모른다. ‘열린 연작 넘버 103: 네모난 큰 푸른 색’을 보면, 작업실에서 우연히 작은 크기의 그림을 큰 그림 앞에 세우다 회화적 통일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착안하며 시작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순수한 시각적 통일감을 창조하려는 화가의 열망이 잘 구현된 이 작품은 ‘열린 연작’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캔버스의 물리적 경계에 의한 한계와 더불어 감정의 깊이와 구성의 무한한 열림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때로는 가볍고 얇게, 때로는 무겁고 두터운 터치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노련한 손놀림으로 푸른색 물감을 켜켜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캔버스는 무한한 하늘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밝은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색이 표현주의적 감성을 더해주는 한편, 단순한 구성의 푸른 배경에 검정 목탄으로 무심한 듯 세 줄을 그어서 캔버스에 다른 공간을 창출해 제한된 듯 무한한 공간을 한 폭의 캔버스에 구현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은 부인했지만 그의 그림 자체가 아시아 사상의 영향을 증명한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리라.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5호 (2021.04.21~2021.04.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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