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치매근심병원 안 되려면

2021. 4. 22.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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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치매를 앓았던 할아버지는 고향집에서 늘 밤에 돌아다니셨다. 언제 집을 나섰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시골 길은 야간에 불빛 하나 없이 어둡고 위험하다. 그런 길을 할아버지는 어떻게 다니셨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새벽녘에 논두렁가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 계신 걸 이웃이 알려와 아버지가 황급히 모셔온 적도 여러 번 있다. 결국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는 극약 처방을 썼다. 당시에는 할아버지처럼 집밖을 배회하는 치매 환자를 받아주는 장기요양시설도 드물었다.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꼬박 5년을 집에서 힘겹게 돌보셨다.

수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얘기를 꺼낸 것은 현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 일환으로 추진 중인 치매안심병원 때문이다. 이곳은 헛것을 보고 마구 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고 주변을 배회하는 등 이상행동 증상(BPSD)이 심해 시설이나 가정에선 돌보기 어려운 중증의 치매 환자를 단기간 입원시켜 전문 치료와 돌봄을 제공한다. 국·공립요양병원이 지정 대상이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치매 환자들은 초기에 집중 치료를 받으면 악화를 막을 수 있다.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간병에 지친 가족들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안심하고 일이나 사회 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 2017년 9월 발표된 치매국가책임제의 핵심 축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추진 4년째인 지금 치매안심병원의 모습은 초라하다. 전국 79곳의 국·공립요양병원 가운데 치매안심병원 지정은 단 4곳뿐이다. 그것도 경북 3곳, 대전 1곳으로 지역적 편차가 크고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는 단 한 군데도 없다. 현 정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데도 추진 실적이 미미한 이유는 뭘까. 치매안심병원의 시설·장비에만 정부 지원이 이뤄졌지, 의사 간호사 등 전문 인력 확보에 대한 재정 지원과 수가 보상 체계는 미흡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공립요양병원이라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 지정 대상을 민간요양병원으로 넓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자 갈 길 바쁜 보건복지부가 무리수를 뒀다. 치매안심병원 지정을 위한 필수인력 전문과(당초 신경정신과, 신경외과, 정신건강의학과)에 한방신경정신과를 추가하는 치매관리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최근 입법예고해 한의사가 치매안심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길을 터 줬다. 복지부는 지지부진한 치매안심병원 수를 늘리려는 의도였겠지만 의료계는 ‘꼼수’라며 발끈했다. 뇌경색이나 뇌출혈 후유증의 경우 현대 의학과 한의학 치료의 병행이 가능하지만 중증 치매 치료에 검증되지 않은 한방 약물을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방 쪽은 “치매 치료에 과학적 근거가 있다”며 맞섰다. 정부가 고질적인 양한방의 밥그룻 싸움을 붙인 격이다.

정부가 사전에 관련 학회와 충분히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게 화근이다. 공청회 등을 통해 양쪽 의견을 수렴하고 한의사의 역할에 대한 합리적 방안을 도출했어야 했다. 의료계는 한방 의료의 보조적 참여는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방 쪽은 말로만 할 게 아니라 공개된 자리에서 한의학적 치매 치료의 효과와 안전성 관련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쳤다면 의료계는 물론 치매 환자와 가족들에게 조금은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다.

정부는 그간 치매안심센터 전국 256곳 설치, 고비용 치매검사 건강보험 적용 등 계획했던 치매국가책임제를 차근차근 실현해 왔다. 제대로 된 치매안심병원 구축은 치매국가책임제의 마침표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양한방의 영역 다툼으로 변질돼 어느 한편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치매 환자를 맡긴 가족의 걱정은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치매근심병원이 아니라 치매안심병원이다.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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