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불사의 명약

2021. 4. 2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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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을 먹여 살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니 '변화 방식'이니 하는 골치 아픈 학문 논쟁은 일반 교인들에게 별 관심 없는 주제다.

10세기경 성찬과 관련해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을 격렬하게 논의하던 때가 있었다.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떤 식으로도 훼손돼선 안 되며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술적 변화의 과정이나 신비한 효능이 아닌 그 안에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사제의 권위나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 형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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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을 먹여 살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니 ‘변화 방식’이니 하는 골치 아픈 학문 논쟁은 일반 교인들에게 별 관심 없는 주제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고대인들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죄에 대한 해독제인 동시에 불사의 명약으로 이해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죽지 않는 ‘신’이기에 그의 살과 피를 받는다는 것은 ‘신이 가진 불사의 능력을 얻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교회에 몰래 들어와 성별된 떡을 훔쳐 가는 일이 꽤 있었다. 게다가 1347년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몰아친 이래 사제들은 교육받지 못하고 서품받는 일이 흔했고, 이런 상황은 성찬을 미신적 이해로 거세게 몰아가는 계기가 됐다.

10세기경 성찬과 관련해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을 격렬하게 논의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떡과 잔 중 ‘평신도에겐 떡만 주는 것’으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교회 현장은 이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 지배했다. 사제들은 일반 신자가 떡을 받는 것조차 위험하게 여기고 회중을 대신해서 떡을 받았다. 교회에서 회중은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교회의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선 사제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성찬 시간에 사제가 떡을 들어 올리면(성체거양) 그 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당시 신앙(학)으론 ‘미사에 참석하기만 하면 늙지 않고 그날엔 급사하지 않고 집이나 곳간이 벼락 맞지 않고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다. 또 ‘성찬 빵을 응시하면 분만하는 산모는 순산하고 여행가들은 안전하게 도착하고 먹는 자와 마시는 자는 소화가 잘될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만일 사제가 떡을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아서 뒷자리까지 보이지 않으면 “더 높이 들어 올리라”고 신자들이 소리쳤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중세 ‘연옥’ 사상과 맞물려 교회 안에서 개인 미사 때 돈을 받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구원의 사건인 성례전이 교회의 공식적인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16세기 종교개혁의 과정을 지나면서 로마교회 당국은 성례전을 이용한 돈벌이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게 된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강조했던 바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떤 식으로도 훼손돼선 안 되며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떡과 잔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떡과 잔, 두 가지를 모두 회중에게 분찬하는 ‘양형성찬’을 실행하게 된다. 신자들은 성찬의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바뀌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술적 변화의 과정이나 신비한 효능이 아닌 그 안에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사제의 권위나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 형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성찬의 에피소드는 오늘 교회의 예배와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보기만 하면, 참석만 하면, 은혜의 효과가 있다”고 가르치는 교회, 배운 게 없으니 신비하고 마술 같은 이야기와 만담과 무용담으로 가득 채운 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사고파는 모습, 사제의 영적 권위가 계급으로 강조되고 거기에 질문이나 군소리 없이 순종하는 신자들의 모습이 개혁돼야만 했던 중세 교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오직 말씀, 믿음, 은혜만으로’를 외치는 오늘의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직도 교회에 가기만 하면 늙지도 않고 벼락 맞지도 않고 그날엔 급사하지도 않고 산모는 순산하고 소화도 잘될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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