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의 문화탐색] 봄날, 문자도 풍경 둘

2021. 4. 22.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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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숭배서 문자 유희로
민중의 욕망 새긴 문자도
한글 소재 새롭게 변신
최범 디자인 평론가

화사한 봄날. 서울 가회동 골목길을 들어서 중앙고등학교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민화 전문 갤러리가 하나 있다. 지난해 하반기에 문을 연 ‘ㅈ’ 갤러리. ‘디자이너의 민화’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갤러리 대표가 실제로 디자이너인데, 일찍부터 민화에 꽂혀 수집해온 이 분야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코로나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은 많이 줄었지만, 갤러리 안은 사시사철 봄이다. 민화 속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닌다.

문자도 하나가 눈에 띄는데, 속도감 있게 휘갈겨 쓴 ‘의로울 의(義)’자 위로 꿩 한 쌍이 몸을 엇갈리며 머리를 마주 보고 있다. 검정색 문자 안에는 꽃잎이 여기저기 박혀 있고 좌우 양쪽으로 발그스레한 젖꼭지를 가진 복숭아와 씨앗이 꽉 차서 곧 터져 나올 것처럼 팽팽한 석류가 그려져 있는데, 너무 노골적이어서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군신유의(君臣有義)가 아니라 부부간의 의리(?)를 말하고 있는 것. 갤러리 안에 핀 농염한 춘심(春心)에 바깥 봄볕이 무색하다.

문자도 ‘의(義)’. [사진 갤러리 조선민화]

문자를 예술로 삼은 곳은 동아시아와 이슬람 문명 밖에 없다. 중세 유럽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성경 채식필사본이 귀하게 여겨졌지만 유럽인들은 문자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슬람의 경우는 우상숭배를 금하기 때문에 성상(聖像)이 없는 대신에 코란 구절로 사원을 빼곡히 채우며 전문 서예가도 존재한다. 그래도 동아시아에 견줄 수는 없다. 동아시아에서 문자는 교양의 증거이자 최고의 예술이었다. 서(書)는 화(畵)에 앞섰다. 그런데 문자도는 서예가 아니다. 민화 문자도는 문자를 소재로 삼은 그림이지 문자 예술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과 뮤지컬의 차이라고나 할까.

내가 알기로 문자도는 한국밖에 없다. 왜일까. 동아시아에서도 유독 한국인이 문자를 사랑해서일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만 문자도가 있는 이유는 한국인이 문자를 더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지배층 문인의 특권이었다. 따라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민중에게 문자는 오늘날 일류대학 간판처럼 차별의 기호이자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문자도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민중은 문자라는 지배의 상징을 그림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그 의미를 전유(專有)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민중은 문자를 쓰지 않고 그렸다. 다만 그 안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집어넣었다. 꽃, 새, 물고기, 용, 거기다 남녀상열지사까지, 민중의 욕망을 문신처럼 찬란하게 새겨넣은 것이다.

파주 출판도시의 한 카페에서 전시되고 있는 안상수의 한글 문자도(‘오눈오네’, 4월 30일까지). [사진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복이자 위반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자도에서 역설적인 자유를 발견한다. 민화 문자도의 진정한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문자도는 그려진 마당극이다. 탈 속에 얼굴을 숨기고 양반들을 조롱한 해학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같은 작품의 진짜 원조는 조선의 문자도가 아닐까.

경기도 파주에 가면 출판도시가 있고 그곳에는 수년 전 한글 디자이너 안상수가 설립한 ‘P’ 독립디자인학교가 있다. 지금 이곳의 한 카페에서는 안상수의 한글 문자도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안상수는 한글을 디자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순수조형으로까지 발전시킨 한글 종합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한글을 소재로 삼아 한 다양한 작업 중에는 문자도도 있다. 그 역시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했지만, 민화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한글 문자도의 세계를 창조했다. 서구의 모던 디자인을 습득한 안상수의 한글 문자도는 민화 문자도의 자유분방함과는 달리 엄격한 비례와 절제된 조형을 통해 어떤 고전주의적인 기념비성을 획득했다고까지 말해도 좋을 듯싶다. 이것은 민화나 인쇄용 글꼴의 정형성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한글 조형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해야 할 작업이라고 하겠다.

아직 코로나가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봄날. 서울 북촌과 파주 출판도시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문자도 풍경을 만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임에 분명하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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