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만에 진압된 유럽 슈퍼리그 '자본의 반란' 결말은

조효석 2021. 4. 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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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팬이 19일(현지시간) 홈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앞에서 유러피언 슈퍼리그 창설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세간의 예상보다 빠른 진압이었다. 유럽축구계에 파문을 일으킨 유러피언슈퍼리그(ESL) 사태가 채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양상이다.

ESL 측은 20일(현지시간) 발표한 공식성명문에서 “(ESL) 프로젝트를 가다듬는 방안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리그 출범 철회를 뜻한 것으로 해석된다. ESL 출범 공동성명을 냈던 12개 구단 중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6개 구단이 이날 탈퇴를 공식 선언한 데 따른 여파다. 안드레아 아넬리 유벤투스 회장은 21일 로이터통신에 “솔직히 털어놓자면 (더는 진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출범 선언, 그리고 폭풍의 사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 팬들이 20일(현지시간) 홈구장인 영국 런던 스탬포드브릿지 인근에서 "(구단을) 가난한 자들이 만들고 부유한 자들이 훔쳐갔다"는 팻말을 걸고 유러피언 슈퍼리그 참가에 항의에 항의하고 있다. 이날 첼시는 참가 계획을 철회했다. 로이터연합뉴스

ESL은 지난 18일 스페인 라리가와 이탈리아 세리에A 각 3개, EPL 6개 구단이 함께 출범 선언을 했다. 세계 프로축구단 가치 1~3위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명단에 들었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의 돈을 받아 유럽의 주요 명문구단들이 모여 별도의 단일리그를 치른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유럽축구연맹(UEFA) 주관의 현 유럽챔피언스리그(UCL)와 유로파리그 체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안이었다.

파장은 컸다. 현지 팬들 사이에서는 연고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유럽 축구 문화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라는 항의가 쏟아졌다. 노골적으로 연고지 팬들이 아닌 해외로부터의 방송 중계 수익만을 노렸다는 비판이다. 각 구단 경기장 앞에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논의에서 배제됐던 선수단과 코치진, 각 구단의 은퇴 선수 등 상징적 인물들도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먼저 꼬리를 내린 건 EPL 구단들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영국축구협회장을 맡은 윌리엄 왕자까지 저지에 나서면서다. 손흥민이 뛰는 토트넘 홋스퍼를 비롯해 리그 선두 맨체스터 시티와 맨유, 첼시 리버풀 아스널까지 모두 사과문과 함께 ESL 탈퇴를 발표했다. ESL 체제 ‘설계자’로 알려진 맨유의 경영전문인 에드 우드워드 부회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거대 시장이 불러온 필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동구단주 조엘(오른쪽)과 아브람 글레이저 형제가 구단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 지난 2012년 8월 10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에 방문해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글레이저 가문이 맨유 구단주 자리에 앉은 건 유럽 축구계가 미국 자본에 넘어간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EPA연합뉴스

이번 사태는 사실 예견된 일이라는 해석이 많다. 현 체제에서라면 리그 당 UCL 출전 자격이 시즌별 최대 4개 팀에 주어지기에 제아무리 부자 구단일지라도 언제든 리그 성적 부진에 따라 이를 박탈당하면서 막대한 손해를 볼 위험이 크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유럽 명문 구단 중에는 성적 부진으로 UCL 진출이 무산, 수입이 줄면서 수 시즌에 걸쳐 도미노식 위기나 몰락을 겪은 곳이 부지기수다.

유럽 축구시장이 2000년대 넘어 미국과 중동, 중국 등 국제 자본 투자로 거대화되면서 이 같은 ‘투자 대비 손실’ 위험은 더 커졌다. 천문학적 자금을 구단에 부은 구단주와 투자자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수익을 보장할 방안을 요구해왔다. 중계권료 수익이 UEFA를 비롯해 대회에 참가한 중소리그에 분배되면서 자신들이 가져갈 돈이 줄어드는 것 역시 이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다. 지난해부터 UEFA가 추진한 UCL 개편안은 이 같은 요구를 반영한 결과다.

최초 보도된 바에 따르면 개편안 초안은 UCL 본선 진출권을 4장 추가하면서 이 중 3장을 역사적으로 좋은 성적을 낸 명문 구단에 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논의가 진행되면서 새 진출권 대부분이 중소리그 구단에 배분되는 안이 유력해지고 개편안 자체도 중계권 수익 배분 문제로 지지부진해졌다. 결국 UCL 개편안으로는 원하는 만큼의 수익 증대나 안정성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자 유명 구단들이 ESL 출범을 단행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유럽축구 ‘뉴 월드 오더’는 도래할까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이 2019년 6월 1일 리버풀과 토트넘 홋스퍼 사이 결승전을 앞두고 경기 장소인 스페인 마드리드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 전시되어 있다. AFP연합뉴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은 있다. 1990년대 말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슈퍼리그’가 명문 구단들 사이에 논의됐고 이는 결국 UEFA가 수익 확대를 위해 UCL 참가팀을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박찬하 해설위원은 “이번 사태는 당시와 달리 명문 구단들이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점’하려는 하는 데서 차이가 있다”면서 “거대 구단들이 중소구단들과 수익을 나누지 않고 독점하고 통제하는 시장을 만들려 시도한 것”이라고 봤다.

한준희 해설위원은 “유럽에서는 축구 문화 자체가 지역에 기반해 오랜 시간 발전했기에 팬들의 반발이 유독 거셌다. 그 반발이 정치적 압력으로도 연결돼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을 단순히 선악 구도로 보지 않는다”면서 “미국식 프렌차이즈 리그를 지향한 이번 시도가 지역민들의 반발에 부딪힌 데 이어 여론에 민감한 정부까지 규제 입장을 밝혔고 구단들이 여기 흔들리는 틈새를 UEFA가 잘 공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위원은 “이번 사건은 코로나19 사태로 지역 관중 수익이 흔들리는 와중에 그 의존도를 줄이고 수익 기반을 국제무대로 가져가려고 한 시도”라면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팬들이 잉글랜드보다 덜 민감하게 반응한 건 중계권료 수익 덕에 코로나19를 잘 버틴 잉글랜드와 달리 팬들 사이 위기감이 더 심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성공했다면 관중 수익에 구단 재정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불씨는 계속 남아 있다”고 내다봤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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