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 열전] '우간다의 나이팅게일' 김정윤 선교사의 삶과 신앙 <1>

전병선 2021. 4. 2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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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평생을 우간다에서 간호사, 선교사로 활동

한국에 서서평 선교사가 있었다면, 우간다에는 김정윤 선교사가 있다. ‘우간다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는 그는 80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간호사이자 선교사로 활동해왔다. 선교지 병원의 교직원과 간호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교도소를 방문해 수감자를 대상으로 전도하고 양육하는데 헌신해왔다. 우간다 교회와 간호대학, 병원을 든든하게 세우는데 한 알의 밀알로 살고 있다. 지금은 한국의 한 병원에서 요양중이다. 김정윤 선교사를 전화와 이메일 등을 통해 인터뷰해 그의 삶을 1인칭 시점으로 기술한다.

우간다는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로 탄자니아, 콩고, 르완다, 케냐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한때는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렸을 정도로 비옥한 땅과 빅토리아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나라였다.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971년 정권을 잡은 독재자 이디 아민의 폭정과 정권 다툼으로 인한 내전으로 극도로 피폐해졌다. 면적은 남북한 합한 크기와 비슷하며 인구는 약 4400만 명이다. 경제는 농업에 기초한 시장경제 체제이며 국내총생산(GDP)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종교는 로마가톨릭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개신교가 약 30%로 뒤를 잇고 있다. 이슬람교(8%)와 부족종교(6%)도 일정 부분을 차지한다. 우간다는 약 80만의 고아를 만든 전쟁보다 에이즈(AIDS)가 1990년대 초반 한때 전 인구의 40%가량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갔을 만큼 더 위협적인 존재다. 지금은 다소 주춤한 상태이긴 하나 콜레라,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과 같은 풍토병이 에이즈와 맞물리면서 사망률을 높이고 있다.

나는 1941년 지금은 대전으로 편입된 당시 대전의 근교 대덕에서 부친 김홍기와 모친 정덕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드리는 예배에 한두 번 참석해 예수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인 1950년 6월 25일 .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났다.

3년여에 걸친 치열한 한국전쟁 끝에 휴전이 된 후 초등학교가 다시 열려 등교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동네에 복음 증거자가 찾아와 교회당에서 어린아이들을 모아 놓고 찬양을 인도하는 것을 밖에서 구경만 했다. 그 미국인 여자 선교사가 마을에 와서 “영원한 생수를 마셔라”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아라”고 우물가에 있던 한 여인에게 말을 하던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예수를 영접했다. 그래서 ‘나도 선교사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한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그래도 미신을 섬기는 마을을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 교실을 예배하는 곳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는 당시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밤낮으로 열심히 예수님을 믿게 됐다. 아버지는 불량한 젊은이들이 교회당에 모이므로 더 교회당에 갈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몰래 교회에 갔다. 이것이 들켜 벌도 받고 매도 많이 맞았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예수님을 잘 믿는 친구들을 아주 부러웠다.

예배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아버지가 “학비 때문에 고등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해 “고등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에 교회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거절당했다. 아버님 몰래 새벽 기도에 참석했다가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일날이면 집 뒤에서 교회당을 바라보면서 몰래 기도를 하곤 했다.

자유롭게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서울로 가기를 기도도 했다. 서울로 이사 가신 고모 집에 올라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게 되어 동생들도 서울로 불러왔다. 서울로 온 뒤 교회를 자유롭게 다니면서 세례도 받고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충성을 다하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근엄하신 아버지가 종종 예배당 뒷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먼저 밖으로 나가서는 나를 기다려 함께 셋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의 평신도 신학과정에 등록을 하고 저녁에 4년간 신학 공부를 했다. 들어가기도 쉽고 학비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1964년 봄에 졸업한 후 주님을 위해 일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안 되어 군산 개정간호학교 (군산간호대학 전신)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게 됐다.

<2> 편에서 계속.

□약력□
-1942년 6월 28일생.
-1964년 장로회신학대학 졸업, 1971년 개정간호학교 졸업, 1973년 단국대 행정학과 졸업.
-1973년 도미, 1974~1985년 초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롱릴 힐 병원 근무, 1976~1985년 초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서재필 기념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사역.
-1985년 3월 선교사 파송(미국 월드컨선, 한국월드컨선, 연동교회).
-1985~1993년 아루아지역 클루바 병원사역, 간호학교 설립 및 교육사역.
-1993~2019년 골리지역 네비교구 산하 4개 보건소 총괄, 전인 구원 사역, 건강검진 및 이동진료 등, 의료전문교육 실시, 장학사역, 교도소 사역.
-1991년 대한기독간호사협회 후원 선교사 허입.
-수상 펜실바니아간호협회 간호사상, 서재필기념재단 봉사상, 언더우드 선교사상.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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