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수탁 '제대로 하라'니 아예 '안 하겠다'는 은행

김소연 2021. 4. 21. 16: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자본 시장 대표주자’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한 명이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입니다. 정 사장의 유머 섞인 찰떡 비유 썰에 덧붙여지는 촌철살인 멘트를 좋아하는 이가 많습니다.

특히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낙하산 비유입니다. “방귀가 잘 나면 보리쌀이 떨어진다(보리밥을 많이 먹으면 방귀를 많이 뀌게 되는데 이걸 컨트롤할 수 있을 때쯤이면 보리쌀이 더 떨어져 안 먹게 된다는 뜻)”라는 한마디로 정리하는데 함께 자리를 한 사람들이 모두 배꼽을 쥐었습니다. “사장 취임식에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하는데, 아니 사장이 뭘 배웁니까. 사장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아는 사람이 와야죠. 배워야 하는 사람이 오면 갚을 외상값만 많아집니다. 아는 건 없고 갚아야 할 것은 많고, 이런 사람이 와서 3년 임기 동안 뭘 하다 가겠어요.” 날카로운 진단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죠.

매경이코노미는 매년 봄 ‘대한민국 100대 CEO’를 선정합니다. 2005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7회째입니다. 본인 이력 중 ‘매경이코노미 선정 100대 CEO’를 맨 위로 내세우는 CEO가 꽤 많을 정도로 인정받는 평가입니다. 올해 막판까지 선정 여부를 고민한 인물이 정영채 사장입니다. 실적이나 평판이나 여러모로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만, 옵티머스펀드 사태로 ‘문책경고’ 중징계를 받은 데다 NH투자증권이 판매한 옵티머스펀드 투자금을 100% 돌려주라는 결정이 나온 게 발목을 잡았습니다.

‘안정적인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해 4~6%대 수익률을 올려준다며 투자자를 모아놓고 실제로는 투자금의 98%를 부실 위험이 높은 비상장 사모사채에 투자했다’는 게 옵티머스 스캔들의 실체입니다. 4월 6일 금감원은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를 적용해 NH투자증권에 ‘전액 반환’ 권고를 내렸죠. 수포로 돌아갔지만, 정 사장은 줄곧 “수탁은행인 하나은행도 책임이 크다. 그러니 함께 배상해야 한다”는 수탁사 공동책임론과 다자배상안을 주장해왔습니다.

실제 수탁사는 펀드 보관, 관리와 더불어 운용감사 역할까지 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들은 “수탁사는 그저 ‘보관’만 할 뿐 ‘관리’나 ‘운용감사’는 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며 책임 논란에서 발을 빼려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제대로 된 수탁사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하니, “그럼 앞으로는 수탁을 맡지 않겠다”고 뻗대고 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수수료 받고 관리까지 하면서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도 지는 리스크를 떠안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자산운용사들은 “이러다 수탁사를 못 찾아 신규 펀드를 못 내놓는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합니다. 매년 수조원대 이익을 내는 은행이 뭐하는 짓인가 싶습니다. (좀 더 자세한 스토리는 토픽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솔직히 은행이 너무 쉽게 돈을 벌어요. 제조업체들이 죽을 듯이 피땀 흘려 돈 버는 걸 보노라면 은행이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을 더욱 무겁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김소연 부장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5호 (2021.04.21~2021.04.27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