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이승만 호적 미스터리
[김종성 기자]
4·19 혁명으로 망명을 떠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사망한 직후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이슈가 있다. '사라진 이승만 호적'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사망했다. 호적 미스터리가 알려진 것은 8월 7일이다. 8월 8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 박사의 호적, 드러난 수수께끼'는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6월 4일 그의 진짜 부인인 박승선을 비롯한 일곱 가족이 호적에서 삭제됐고, 한국전쟁 2개월 전인 1950년 4월 그가 프란체스카 도너와의 결혼신고서를 종로구청에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운요호 사건(운양호 사건, 강화도에서 함포 쏘며 시비)을 도발한 1875년에 출생했다. 박승선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승선이 아니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독부 이승만 평전>은 "뒷날 남편 이름에서 승(承)자를 따서 승선으로 개명했을 정도로 남편을 사랑"했다고 말한다. 이들이 결혼한 것은 만 16세 때인 1891년이다.
프란체스카는 1900년생이다. 그가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한 것은 1934년이다. 이때도 박승선은 이승만의 부인이었다. 이승만의 생질(누나의 아들) 심종철은 위 기사 속편인 8월 11일 자 '속(續) 이 박사의 호적 수수께끼 (중)'에서 "이 박사가 1912년 두 번째로 도미할 때 박 여사와 구두로 협의 이혼했다는 말을 그 후에 들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종철은 "그 근거는 알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 1904년 이승만·박승선 부부(오른쪽)가 아버지 이경선과 아들 태산(모자 쓴 이) 그리고 형수 및 조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국기독역사여행] 망명가 이 박사 부인의 연단, 성경이 있었다'(국민일보, 2020.11.6) 기사에 실린 사진. |
ⓒ 국민일보 기사 |
계속 만나러 온 아내 외면한 남편
자신을 이승만 부인으로 생각하는 박승선,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이승만 부부. 이 3인이 해방 뒤 대한민국 법률 아래 모이게 됐다. 대한민국 법률 아래서 이들의 관계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쟁과 대립의 구도가 이들 사이에도 출현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김포 비행장에 착륙해 조선호텔(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에 투숙했다. 그로부터 8일 뒤에는 조선타이어 사장 장진섭의 집인 돈암장에 짐을 풀었다. 지금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이곳에서 1947년 8월 18일까지 기거했다.
"이 박사가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님은 이 박사가 묵고 있는 돈암장으로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만나주질 않아 그때마다 돌아오곤 했다."
이승만은 1912년 이후 5년 정도 서신을 교환하다가 더 이상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 또 온 나라가 다 알 정도로 1945년 10월 귀국한 뒤에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박승선이 돈암장을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 정도였는데도 박승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렸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여전히 자기 남편이었던 것이다.
박승선은 만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 어머니까지 여의었다. 궁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시위대에 밟혀 죽었다. 그 뒤 지금의 서울 후암동 외가에서 성장한 그는 16세 때인 1891년 외할아버지 중매로 앞집에 사는 이승만과 결혼했다. 여기서 이태산(이봉수)이란 아들을 얻었다. 태산은 1904년에 출옥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다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승선은 의리가 있었다. 24세 때인 1899년 남편 이승만이 고종 황제 폐위 음모에 연루돼 투옥되자 지금의 서울시청 앞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사흘간 단식하고 통곡하며 석방을 탄원했다. 또 직접 돈을 벌어가며 남편 옥바라지와 시부모 봉양을 책임졌다. 그리고 남편이 미국으로 재차 떠난 1912년 이후에는 이승만 아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동리 사람들이 누구나 집을 지을 터가 업스니 엇지하면 조흐냐고 걱정을 하면 부인은 자진하야 집터를 빌리(빌려주)는 등, 또는 기타로도 자긔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남을 위하여 만히 애를 써서 그 근처에서는 박 부인의 칭송이 자자하야 박 부인의 집이 잇는 근처에는 전에 없든 인가가 수십 호나 생겨 새로운 촌락을 일운 터인 바
이승만 부인이 선행을 베풀었으니 사람들은 박승선의 이미지를 통해 이승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공을 쌓아가며 남편과의 재회를 학수고대하던 그가 해방 뒤 전혀 뜻밖의 상황에 부딪히게 됐던 것이다.
70세로 맞이한 해방 당시, 박승선은 황해도에 있었다. 1965년 8월 10일 자 '속(續) 이 박사의 호적 수수께끼 (상)'에 따르면 남편이 귀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집은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황해도 지사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정치범의 아내'에서 '유력 지도자의 아내'로 순식간에 뒤바뀐 결과다. 그런 그가 정작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채 매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를 인정하라' 단식 투쟁
그 과정에서 박승선은 프란체스카의 존재를 알게 됐다. 1946년 2월 23일 자 <조선일보> '이 박사 부인 리 여사 도착'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이승만보다 늦은 1946년 2월 21일 김포 비행장에 착륙했다. 박승선이 프란체스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 이전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근대 한국의 이미지 중 하나는 '인종(忍從)의 여성상'이다. 남편이 첩을 들여도 묵묵히 참아내는 비녀 꽂은 여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부분적으로만 사실과 부합한다. 박승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냉담과 더불어 프란체스카의 등장은 박승선의 칠십 평생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이승만의 아내로 살아온 그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박승선은 이에 맞섰다. 그는 자신의 법적 권리를 주장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이승만의 정실부인이라고 주장했다. 위의 '이 박사의 호적 수수께끼 (상)'에 따르면 그는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첩이지 부인이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프란체스카는 그저 첩일 뿐이라고 항변한 것이다.
▲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
ⓒ 국가기록원 |
아내의 존재 자체를 부인
이승만은 무시 전략으로 일관했지만 박승선은 단념하지 않았다. 황해도와 서울을 수십 차례 오가며 자신의 존재를 계속 시위했다. 그런 박승선에게서 법적 무기를 빼앗고자 이승만이 감행한 일이 바로 1949년 6월 4일의 호적 변조다.
이 당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과 극우세력의 공격으로 정국 상황이 어수선할 때였다. 6월 2일에는 극우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친일파 석방을 요구했고, 3일에는 극우 시위대가 반민특위 본부를 공격했고, 5일에는 내무부장관 장경근이 반민특위 경찰인 특경대 해산을 모의했고, 6일에는 극우단체가 아닌 경찰이 직접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렇게 혼란스럽던 시기에 이승만 대리인들이 서류를 꾸며 박승선과 양자 가족을 호적에서 파냈다.
그 호적부에는 '처의 관계' 및 '친자관계' 그리고 '손(孫)의 관계' 등 부존재 확인 판결에 의해 이 박사가 정정신청을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권위 있는 법조인들은 물론 호적관계 전문가들도 '처의 관계 부존재 확인소송이란 명칭도 없고 그런 소송이 있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면서 '아무튼 당시의 지방법원 판결을 거치지 않은 사실만 확인되면 그들의 호적 전부가 마땅히 회생돼야 한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제적 경위 등 많은 의혹이 뒤따르게 됐다.
처의 관계 부존재 확인소송은 다른 말로 하면 '부부관계 부존재 확인소송'이다. 헤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송이 아니라 부부로 산 적이 없음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이었다. 이런 소송을 거쳤다면서 이승만 측이 박승선과 그 가족을 호적에서 파냈던 것이다.
박승선은 현모양처나 조강지처 같은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수식이 다소 곤란한, 이승만에게는 매우 고마운 은인이었다. 그랬는데도 이승만에게 냉대를 받은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프란체스카와 이승만에게 지속적으로 맞섰다.
그런데 이 싸움은 단순히 '남편 이승만 부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독재자 이승만 부부'와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기기 어려운 대결이었다. 결국 호적에서 파이는 허무한 패배를 당한 그는 한국전쟁 때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 점령돼 있을 때 소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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