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입원은 수백 년 전 방식.. 격리시설 아닌 대학 다니면서 치료"
올해는 정신분열병이란 병명이 조현병으로 바뀐 지 10년이 되는 해다. 정신분열병이라는 병명이 사회적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조현병으로 개정한 것이다. 조현(調鉉)은 ‘현악기의 줄을 맞춰 음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다. 조현병 환자는 조율 안 된 현악기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를 겪고 있다는 뜻이다. 조현병은 불치병이 아니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과거 조현병을 앓았던 엘린 삭스(65·여)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 법대 교수는 지난 16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도 조현병은 정신이 분열됐다는 의미인 정신분열병(schizophrenia)으로 불리고 있어 편견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처럼 미국에서도 조율장애를 의미하는 조현병 등으로 병명을 바꾸는 프로젝트를 다른 정신과 교수, 변호사 등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삭스 교수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다.
삭스 교수는 자신의 조현병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정신질환 관련 인권 활동을 펴고 있다. 삭스 교수는 한국의 조현병 병명 개정을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정신질환 관리 시스템에 대해선 쓴소리를 했다. 그는 “10년 이상 병원에 입원시키는 방식은 미국에서도 수백년 전에나 해왔던 방식”이라며 “최대 3일간 머물다 밖으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빠른 입원과 퇴원, 그리고 회복을 지원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삭스 교수는 2007년 조현병 극복기를 담은 자서전을 펴냈으며, 2010년 미국의 정신보건법 개정과 정신질환자 인권 개선 등을 위한 싱크탱크 ‘삭스 연구소(Saks Institute)’를 설립했다. 2012년엔 미 비영리 강연회 ‘테드(TED)’에서 자신의 조현병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삭스 교수는 용인정신병원이 21일 조현병 병명 개정 10주년을 기념해 여는 온라인 학술대회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삭스 교수가 처음 조현병 증세를 보인 것은 16세 때였다. 그는 어느 날 학교에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때 길가에 있던 집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고 집과 대화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이런 증세는 계속됐다. 몇 달간 병원에 입원했지만 망상 증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예일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뒤 증상은 심해졌다. 법대에 들어가고 50일 뒤쯤 삭스는 대학 옥상에 올라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대낮에 눈을 뜨고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마약을 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친구들과 함께 과제를 하다가 “너 사람 죽여본 적 있느냐”는 괴상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수업 후에도 교수에게 이상한 말을 늘어놓은 뒤 삭스는 정신병원에 갇히게 됐다.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정신병원은 조현병을 치료해 주는 기관이 아닌 환자들을 묶고 때리는 곳으로 기억됐다. 삭스 교수는 “누군가 해친 적도 없는데 20시간씩 손과 발이 묶인 채 지낸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삭스 교수는 5개월간의 입원 끝에 퇴원해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담당 의사는 다시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예일대 법대를 휴학하고 상점 계산대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시 삭스 교수는 조현병 환자들이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정신병 환자’로 낙인찍힌 뒤부터는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억압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삭스 교수는 평생 해왔던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예일대 법대로 돌아갔다. 1주일에 5번씩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처방된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결국 격리시설이 아닌 대학을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학교의 배려 덕분에 조현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삭스 교수는 이후로 더 이상 조현병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 법대 졸업 후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질환자를 위한 인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삭스 교수는 “병원에서 나온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라고 말했다.
사회의 편견 때문에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숨겼던 삭스 교수는 이제 앞장서서 조현병을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정신병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입원과 치료 환경이 갖춰져야 하며 몸을 묶어 놓는 방식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와 치료에 많은 지원과 관심이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방식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고 한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범죄자들이 ‘정신건강법원’에서 판결을 받게 하고 이러한 범죄자들이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삭스 교수는 한국의 정신질환 관리 시스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병원 내 환자 인권은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대체로 환자 가족의 ‘독박 돌봄’ 형태에 의존하는 현실이 문제라는 것이다. 퇴원한 조현병 환자의 일상 회복을 위한 지원도 부족하다.
한국에서 환자의 일상 복귀를 돕는 정신재활시설은 전국적으로 348곳(2018년 말 기준)에 그치고 있다. 또 이 시설의 절반가량은 수도권에 편중돼 있다. 병원이나 시설에 10년 이상 장기 수용된 환자는 2만명에 달한다. 삭스 교수는 “인구 15만명의 영국 옥스퍼드에는 무려 42개의 정신질환자 그룹홈이 마련돼 있다”며 “정신질환자들이 병원에서 나온 뒤 사회의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적응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격리와 억압에 의존하기보다 사회적 지원을 통한 치료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세원 기자 o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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