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성훈 (2) 스포트라이트 체질.. 노래와 춤에 빠진 '날라리 삶'

양한주 2021. 4. 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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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독일에 가기 전까지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날라리'가 아닐까 싶다.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나는 물 만난 듯 신나게 탈춤을 췄다.

당시 흥사단에 있던 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전수교육조교 최창주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나를 눈여겨보면서 봉산탈춤 일반전수자가 됐다.

춤을 더 잘 추고 싶단 마음에 대금을 배운 것도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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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꿈 코미디언, 공부와는 담 쌓아
졸업 후 흥사단 입단 봉산탈춤 전수자 돼
이때 배운 대금, 오르간 한국화에 큰 역할
서울시립가무단 단원이던 홍성훈(오른쪽)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85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오페라 ‘안드레아 세니에’ 공연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86년 독일에 가기 전까지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날라리’가 아닐까 싶다. 무엇 하나에 깊게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배웠다.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당시의 신앙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얕았다. 그 27년엔 하나님 얘기가 없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도 하나님은 늘 나를 통해 일하고 계셨다.

학창시절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팝송을 부르고 기타를 치며 다니는 날들이 많았다. 당시 꿈이 코미디언이었을 만큼 사람들을 웃기는 게 좋아서 찰리 채플린처럼 지팡이 짚고 따라 하기도 했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우연히 슈베르트의 ‘밤과 꿈’이라는 곡의 기타 연주를 듣고 매료됐다. 기타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계속 배우다 보니 남보다 좀 빨리 습득해 연주할 수준까지 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 생활을 시작하고도 공부보단 당시 살던 동네이자 ‘문화 1번지’라고도 불린 서울 종로구 혜화동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혜화동에 흥사단이 있었다. 당시 흥사단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도산 안창호 선생의 철학을 배우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삶의 자세를 본받자는 내용의 시국 강연을 했다. 그 강연을 매주 찾았다. 집과 흥사단, 당시 다니던 연동교회를 오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자연스럽게 흥사단에 입단하게 됐다.

나는 흥사단에서 봉산탈춤과 장구 등 우리 문화를 배웠다.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나는 물 만난 듯 신나게 탈춤을 췄다. 당시 흥사단에 있던 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전수교육조교 최창주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나를 눈여겨보면서 봉산탈춤 일반전수자가 됐다. 춤을 더 잘 추고 싶단 마음에 대금을 배운 것도 이때다. 이 시기에 접한 대금의 소리는 훗날 파이프오르간에 한국적 소리를 입히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80년대 초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 어수선하고도 혼란스러웠던 격동기였다. 그 당시 흥사단에서 저항정신이 담긴 탈춤을 추다 보니 여러 곳에서 나를 찾았다. 사람들이 춤을 보고 위로와 동기부여를 받는 모습을 보며 나도 괜스레 신이 났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 사람들이 나의 무대에 웃고, 그에 따라오는 인기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 축제에 사회자나 레크레이션 강사로 초청되는 일도 잦았다. 그 틈새에 요트도 알게 돼서 주말엔 요트 조종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훈아 서울시립가무단에 들어와라.” 그러던 중 84년 당시 서울시립가무단에서 배우 활동을 하던 최 교수가 가무단 입단을 권유했다. 지금이야 뮤지컬단의 경쟁률이 매우 높지만, 당시만 해도 뮤지컬에 관한 관심이 높지 않던 때였다. 미래에 대한 큰 계획 없이 그저 재정이 궁핍하지 않게 노래하고 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만 기뻤다. 그렇게 세종문화회관으로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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