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노무현 정부는 대북전단 막지 않았다
주민 불안 해소 대안 얼마든지 있어
낙숫물이 바위뚫듯 북 변화 일어날 것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탈북자 이민복 씨가 e메일을 보내왔다. 지난주 열린 미국 의회의 랜토스 인권청문회에 거는 기대가 컸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대북전단금지법(개정 남북관계발전법)의 문제점에 대한 심층 토론이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이 씨는 북한 농업과학원에 근무하던 엘리트 탈북자다. 북한에서 배운 모든 것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2005년 한국에 정착한 직후부터 ‘풍선 날리기’를 소명으로 삼았다.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알려 깨우치게 하고, 더 이상 속고 살지 않는 길을 택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유체역학과 항공 기상을 공부하고 가스안전관리 자격증을 딴 그가 전단과 USB 메모리 등을 풍선에 띄워 보낸 횟수는 수백 차례를 헤아린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가장 활동이 자유로웠다. 당시 남북회담에 나온 북한 대표가 항의하며 증거품으로 북한에서 수거한 전단을 한꾸러미 갖고 왔다. 통일부가 받아 분석해 보니 100% 이 씨가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 씨의 활동을 막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만든 대북전단금지법은 국제사회로부터 반(反)인권법이란 비판의 표적이 됐다. 아이러니인 것은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 역시 인권이란 점이다. 정부 당국자는 “누군가의 인권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이 표현의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다.
이 씨는 “접경 지역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전단을 날렸다”고 했다. 밤낮없이 풍향과 풍속 정보를 들여다보다 ‘바로 지금’이란 판단이 서면 즉시 수소가스 장비를 장착한 트럭을 몰고 출동한다. 가급적 외진 곳을 찾지만 우연히 현장을 구경하게 된 주민들은 “수고 많다”는 뜻으로 박수를 보내곤 했다. 굳이 민통선 근처로 바짝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 풍선이 5000m 상공에서 초속 10m의 바람을 타면 세 시간 만에 훌쩍 100㎞를 날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북한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일을 끝내면 주민이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언제부턴가 대북전단 살포가 이벤트화하기 시작했다. 사전 예고한 시간·장소에 방송 카메라가 모여들고 이벤트 규모도 점차 커져 갔다. 자연히 북한의 주목을 끌고 접경지역 주민들도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언젠가 사석에서 통일부 당국자로부터 들은 얘기에 답이 있다. 그는 “드러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다”면서 “북한인권단체나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싼 생태계가 형성돼 있다”고 했다. 이벤트를 거창하게 벌이고 신문·방송 보도가 많이 나올수록 후원금 액수가 올라간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벤트를 선호하는 단체일수록 풍향·풍속에 지식이 없고, 북한에 도착하는지도 관심이 없더라는 게 이민복씨가 전한 관찰 결과다. 이게 대북전단의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대안이 나올 수 있다. 일률적으로 대북전단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날려 불안을 조성하는 행위만 금지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접경지역 주민의 불안은 대부분 해소된다. 전단금지법 없이 기존 법률로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률적인 전단금지법을 밀어붙였고, 3월 말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돌아온 건 “한국의 민주주의가 부식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김정은 체제가 지난 연말부터 ‘반동사상문화 배격법’이란 것을 만들어 외부 정보 유입을 극도로 통제하고 있다. 그 강고한 철의 장막 위로 풍선을 띄워 보내는 것은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은 노력의 하나다. 설령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정부가 앞장서서 그런 노력을 원천봉쇄할 이유는 없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결국은 바위에 구멍을 내는 이치대로 북한의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김정은을 트럼프와 만나게 해준다고 북한이 갑작스레 변화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지켜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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