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운용사 '수탁사 확보 대란'..펀드파동 후 은행 외면에 발 동동

박수호 2021. 4. 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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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이상 자본 시장에서 일해온 A씨. 그동안 쌓은 노하우로 신규 자산운용사를 만들려고 나섰다가 난항에 빠졌다. 수탁사를 정할 수 없어서다. 수탁사란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을 실물로 보관하는 회사를 뜻한다. 공모든 사모든 가리지 않고 새로운 펀드를 내놓기 위해서는 우선 펀드를 설계하고 운용할 자산운용사가 있어야 한다. 또 이를 판매할 판매사와 더불어 펀드 자산을 보관하는 수탁사가 있어야 펀드를 만들 수 있다.

통상 금융권에서는 은행이 수탁사 역할을 많이 한다. 그런데 최근 수탁사 업무를 거부하거나 심사를 까다롭게 하는 은행이 부쩍 늘었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A씨는 “고객 재산을 운용과 분리하기 위해서는 꼭 수탁사가 필요하다. 수탁사는 펀드 보관, 관리와 더불어 운용 감사 역할까지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최근 라임, 옵티머스 사모펀드 사고 이후 수탁사의 수탁 거부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신규 운용사만의 일이 아니다. 종전 운용사 역시 고민이 많다.

한 운용사 대표는 “이러다 신규 펀드는 아예 못 만드는 것 아니냐”며 걱정이 태산이다.

옵티머스펀드 사태 이후 신규 펀드 설립에 많은 운용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 <연합뉴스>
▶사모펀드 사태 후폭풍

▷펀드 부실, 수탁사 연대 책임 움직임

자산운용업계 ‘수탁사 확보 대란’을 이해하려면 최근 금융감독원의 옵티머스 사건 조치 과정을 보면 이해가 쉽다.

최근 금감원은 대규모 손실을 낸 옵티머스자산운용 사모펀드를 가장 많이 판매한 NH투자증권이 투자자들에게 약 3000억원의 투자 원금 전액을 돌려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NH투자증권은 이와 달리 다자배상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자배상안이란 펀드 판매 관련해서 여러 업체가 관여된 만큼 함께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가 골자다. 이때 등장한 것이 수탁사 공동 책임론이다.

NH투자증권 입장에서는 ‘수탁사, 사무관리사 역시 부실을 못 알아챈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일단 금감원 결정은 판매사인 NH투자증권에 전적으로 책임을 물어 전액 보상을 하라고 했지만 NH투자증권이 법적 다툼으로 끌고 가면 사후 논란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현장 분위기는 “위험 회피”

▷각 은행 “골치 아픈 펀드는 수탁 거부”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각 은행 입장에서는 ‘더 이상 수탁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 은행은 아예 운용사를 상대로 ‘최소 설정 규모 이하일 경우 설정 불가’ ‘우량(대형 운용사) 고객사가 아니면 신규로 보고 수탁 거부’ ‘신용 리스크 발생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인한 수탁 거부’ 등 구체적인 이유를 나열하기도 했다. 여차 저차 기준을 맞춰가도 최종적으로 한 은행 담당자는 ‘업무량 과다’ 이유를 들어 수탁 업무를 거부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한 은행 관계자는 “어차피 수수료도 낮아 은행 이익에 별 도움이 안 되는데 사고를 낸 판매사는 연대 책임을 강하게 물으려 하고 있으니 관련 직원의 부담감이 여느 때보다 크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전통자산(상장주식, 채권)을 제외한 자산에 대한 수탁은 안 하는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전문투자자가 아닌 일반투자자 대상 펀드는 괜히 수탁했다 민원이 들어오면 시끄러울 수 있어 최대한 안전한 펀드 위주로만 수탁 업무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금융투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공모펀드 수탁고는 2018년 65조원, 2019년 74조원으로 꾸준히 늘었다가 라임, 옵티머스 사건이 불거진 지난해 72조원으로 감소했다. 공모 채권형 펀드 역시 2019년 35조원 규모였던 것이 지난해 33조원 규모로 전년 대비 4.9% 줄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모 MMF에는 지난해 102조원이 몰려 전년 74조원 대비 38%나 급증했다.

▶간접 투자 시장 고사 위기

▷정부 주도 코스닥벤처펀드 설정도 난항

이는 정부의 모험 자본 진흥 정책과도 배치된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적극 밀고 있는 코스닥벤처펀드, 뉴딜펀드, ESG펀드 등을 만들려고 해도 수탁사가 비협조적이니 결과적으로 자본 시장 성장에도 도움 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와 더불어 금융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금융감독당국도 이런 면에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신성환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는 “금융당국은 2015년 사모펀드를 등록제로 전환하고 투자 규모도 5억원에서 1억원으로 낮추기만 했을 뿐 부실 펀드 사고 징후 포착, 감독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막상 사건이 터지자 강한 제재를 하면서 금융사와 법적 분쟁만 장기화하게 됐다. 라임 사태 후에도 일방적으로 판매 회사에만 책임지게 하면서 결과적으로 자본 시장 자체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안은 없나

▷수탁은행 수수료율 현실화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한 금융투자협회, 국회의원 등은 대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럴 거면 펀드 전문수탁사 설립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금융투자협회도 민간 차원 전문수탁사 설립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수탁·사무관리사 시트코(Citco)가 그 예다. 시트코는 전문펀드수탁·사무관리사로 관리 자산 규모만 약 1조1000억달러(약 1200조원)에 달한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민간 차원의 새로운 수탁사를 만들 수 있지 않나라는 취지에서 해외 사례를 찾아봤다”고 소개했다.

이와 관련 금융당국은 현실성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분위기다.

현실적인 대안은 수탁은행에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주거나 금융당국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성환 교수는 “한국증권금융, 예탁결제원 같은 공공기관은 영리 목적이 아닌 공공 기준으로 펀드 보관, 재산 관리, 철저한 감시 확대 기능을 강화해 수탁을 하게 하든가, 아니면 명확한 책임 소재를 알려주고 대신 수탁은행 수수료율 현실화 등 시장 기능이 작동하도록 금융당국이 유도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5호 (2021.04.21~2021.04.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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