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가 밀정이라고? 황당한 보드게임 펀딩

김경준 2021. 4. 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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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아들, 독립군 사령관이 밀정 카드에.. '코레아 우라!' 제작진 "명예 실추 죄송"

[김경준 기자]

최근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 들어갔다가 인상적인 프로젝트를 발견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소재로 한 보드게임 <코레아 우라>의 펀딩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마피아 게임을 표방한 <코레아 우라> 펀딩 사진
ⓒ 텀블벅 캡쳐
 
해당 보드게임을 개발한 업체는 "아픈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 선조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있다는 것을 배워 나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작하게 됐다"라며 "인물카드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알 수 있고, 임무카드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 사건들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개발 취지를 밝혔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3.1운동, 안중근 의거, 청산리 대첩,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 실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임무카드와 김구, 김원봉, 안중근, 유관순, 김마리아 등 실존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로 만든 인물카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드게임 <코레아 우라> 독립운동가 카드
ⓒ 초이스
 
우리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한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는 생각에 흐뭇함을 느끼며 스크롤바를 내리다가 그만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친일파·밀정 카드'에 그려진 인물 도안 때문이었습니다. 밀정으로 실존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가 등장했습니다. 
'밀정'이 돼 버린 백범의 아들
 
 <코레아 우라> 펀딩 페이지에 올라온 친일파 밀정카드와 도안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되는 실존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비교
ⓒ 김경준 편집
 
제가 발견한 독립운동가만 해도 벌써 세 명입니다.

오동진(1889~1944)은 광복군총영 총영장, 정의부 군사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던 인물로, 일제에 의해 체포돼 고문 끝에 순국한 만주 지역의 독립군 사령관이었습니다. 그 혁혁한 공로가 인정돼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김인(1917~1945)은 백범 김구 선생의 장남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아버지 김구 선생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를 따라다니며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러다 광복 직전 폐병으로 순국하며 이국 땅에 한 많은 청춘을 묻어야만 했습니다.

김산(1905~1938)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Song of Ariran)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더욱 유명한 인물입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일본, 만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누비며 중국 공산혁명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혁명투사였습니다.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셋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명백한 독립운동가들이라는 점입니다. 밀정이기는커녕 최전선에서 일제와 싸웠던 행동파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업체 측은 "가상 인물로 제작했다"고 볼드 처리까지 하면서 강조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세 명의 사진과 업체 측에서 제작한 밀정 인물카드의 도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옷깃과 헤어스타일마저도 동일합니다.
 
 <코레아 우라> 측의 친일파·밀정카드 설명. '가상 인물'로 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텀블벅 캡쳐
 
역사콘텐츠 개발의 교훈으로 삼아야
다행히도 누리꾼들이 정식으로 항의하고 문제를 지적하자 업체 측은 하루 만인 18일 오전 해당 이미지를 내리고 정식으로 사과문을 올리는 발 빠른 대처를 보였습니다. 또 해당 디자인에 대한 전면 수정에 들어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18일 오전에 업데이트된 업체 측의 공식 사과문
ⓒ 텀블벅 캡쳐
 
추가로 취재한 결과, 해당 업체 대표는 "디자이너가 가상의 인물을 그리는 중 어려움을 느껴 옛날 사진을 찾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분들이 독립운동가 분들이라는 것을 몰라 디자인을 했다고 확인을 받았다"라며 고의성이 없는 단순 실수였다고 해명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진행해 이런 사태를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며 "좀 더 공부하고 노력해 이런 실수가 없도록 더 많은 역사를 바로 알고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업체 측의 발 빠르고 적극적인 대처에 대해서는 칭찬을 보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물카드 제작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해당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기초적인 파악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고 황당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고 해도, 과정이나 결과가 잘못됐다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선양할 목적으로 보드게임 개발을 추진한 업체의 의도는 훌륭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존 독립운동가들을 밀정으로 만들어 명예를 훼손한 것은 단순 해프닝으로 넘길 가벼운 사안이 아닙니다. 하마터면 독립운동가들이 밀정으로 묘사된 카드가 대중에 유통될 뻔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 논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역사를 소재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신중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실존 인물을 가져다 쓴다면 두 말할 필요도 없지요.

업체 측의 발 빠른 대처로 일단락되기는 했으나, 이번 논란이 해당 업체뿐만 아니라 역사콘텐츠를 개발·제작하는 이들 모두에게 반성과 교훈의 계기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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