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기사가 알려준 현지에서 부자되는 법 [40대 백수가 얼떨결에 간 쿠바]

이희동 2021. 4. 1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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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백수가 얼떨결에 간 쿠바] 올드카 타고 아바나 일주

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이희동 기자]

 올드카를 타고 아바나 베다도로
ⓒ 이희동
 
우리가 올라탄 분홍색 올드카 기사의 이름은 마리오였다. 그는 젊고 유쾌했으며, 영어도 잘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전직 스튜어디스 누님의 도움으로 쿠바 현지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카스트로와 공산주의에 대한 불만뿐만 아니라 쿠바의 심각한 빈부격차 등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여행객들은 쿠바 혁명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오지만, 쿠바인들 중에서는 나이든 사람만 그럴 뿐, 자신을 포함해 대부분의 쿠바 젊은이들은 돈만 있으면 미국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이것이 쿠바의 현실이라니. 마리오는 거기에다 웃으면서 결정타를 하나 날렸다. 쿠바에서 부자가 되고 싶으면 다음에 올 때 비누와 세제를 가져오라나. 현재 쿠바에서 배급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가장 부족한 물품이 비누와 세제라고 했다. 음식도 연료도 아니고 비누라. 결국 비합리적인 공산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의 단면이었다. 
 
 아바나대학의 정면
ⓒ 이희동
 
마리오는 우리를 아바나의 베다도 지역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올드 아바나나 센트로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올드 아바나가 여행객을 위한 화석화된 공간이요, 센트로가 넉넉지 못한 쿠바인들의 일상이라면, 베다도는 아바나의 중산층들이 살고 있는, 나름 풍족한 느낌의 지역이었다. 그곳에는 엊그제 보지 못했던 극장과 은행, 경찰서, 대학교 등이 눈에 띄었다.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쿠바의 어떤 모습을 봐왔던 것일까? 그곳은 내가 그렸던 만큼 낭만적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주 가난하거나 피폐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결국 그곳에다 온갖 의미를 부여했던 건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쿠바의 중국인과 조선인

마리오는 우리가 가지 못한 아바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는 처음 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구조물도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 국회의사당 까삐똘리오 뒤에 위치한, '華人街'라고 적혀 있는 차이나타운의 패루였다.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양을 하고 차이나타운의 패루. 그것은 이곳에서 중국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는 단순한 표시가 아니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표시이며, 그 역사와 영향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의미이다.
 
 아바나의 차이나타운 패루
ⓒ 이희동
 
쿠바에 중국인들이 처음 오게 된 것은 1800년대 중반 청나라 때였다. 당시 쿠바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탕수수 재배지였는데, 1840년대 노예해방운동으로 인해 노동인구가 격감하자 스페인 제국은 흑인 노예 대신 중국인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농업유형이 아메리카와 비슷하며, 중국인들은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광둥성, 복건성 등 연해지역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경작지가 부족했다. 게다가 몇 년째 흉년이 이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는데, 이때 많은 중국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고, 그중 많은 이들이 멕시코, 미국, 캐나다, 페루 등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은 그 중 하나였다.

덕분에 기존의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흑인 대신 중국인 노동자, 쿨리를 대상으로 가동되었고, 중국인들은 그렇게 초기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갔다. 지금 세계 곳곳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은 그렇게 고생했던 중국인들의 흔적인 것이다.

그런 차이나타운을 보니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때 쿠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왔던 조선인들과 그의 후예들인 꼬레아노가 떠올랐다. 쿠바로 오는 비행기에서 봤던 다큐멘타리 <헤로니모>는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주역이었던 한인 헤로니모에 관한 영화였는데, 그의 아버지 임천택이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쿠바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럼 지금 쿠바에서 그들의 자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그래도 중국인들은 워낙 사람도 많고 같은 공산주의 국가의 인민으로서 대접도 받았을 것 같은데, 꼬레아노들은 공산주의 북한 덕분에 대접을 받았을까? 그것도 아님 분단의 영향 때문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했을까?

가이드에 따르면 쿠바 내 한인 사회는 한국과 쿠바의 정식 수교가 없는 만큼 현재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듯했다. 남한은 오랫동안 쿠바와 적대적 관계였으며, 북한 역시도 지금은 쿠바와 소원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체 게바라가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질 만큼 쿠바와 가까운 북한이었지만 80년대 동구권 붕괴 이후 북한이나 쿠바 모두 각자도생하느라 바빴다.
 
 영화 <헤로니모>
ⓒ 커넥트픽쳐스(주)
 
영화 <헤로니모>에서 주인공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아왔던 그였지만, 동구권이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고, 그는 그것을 민족에서 찾았다. 중국이 90년대부터 중화주의를 강조했듯이.

다만 문제는 아직까지 한국 사회가 쿠바의 한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직 우리의 민족주의는 폐쇄적이다.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의 고려인조차 같은 민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 쿠바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이다. 쿠바와 수교를 맺고 왕래가 잦아지면 이 역시 변화하게 되겠지.

"꼬레아? 코로나 비루스?"

올드카를 얼마쯤 탔을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리오는 올드카를 근처 병원 주차장에 세운 뒤 지붕커버를 수동으로 닫기 시작했고, 산악구조대 형님은 잠깐 그 새를 못 참고 차에서 내려 병원을 둘러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렇게 몇 분 지났을까? 간호사로 보이는 쿠바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냐고, 왜 왔느냐고. 그러자 마리오가 웃으면서 형님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한국인인데 아픈 것 같다고 말했다. 순간 간호사의 까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꼬레아? 코로나 비루스(바이러스)?"

그의 단말마 같은 외침에 우리는 당황하여 'just joke'라며, 아무 데도 아프지 않다며 그 자리를 떴지만, 내심 심란했다. 그날이 2020년 2월 22일. 전 세계에서 중국 이후로 한국에 가장 많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나타난 기간이었다. 그러니 당시까지만 해도 코로나 청정국인 쿠바에서는 한국인의 존재가 두렵고 무서울 수밖에.

아찔했다. 이러다가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뉴스를 보아하니 중국 발 비행기를 막는 국가들도 속출하고 있는 것 같던데. 설마 대사관도 없는 이곳에서 국제적 미아가 되는 건 아니겠지?

나중의 일이지만 우리 일행은 엄청나게 재수가 좋은 경우였다. 우리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지만, 그 뒤의 여행객들은 귀국 과정이 한 편의 영화였다고 했다. 쿠바에서 한국까지 45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기본이요, 어떤 남미 여행객들은 몇 달 동안 현지에 발이 묶였다고도 했다. 우리는 2020년 한국의 거의 마지막 해외 여행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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