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달라는 고객, 안된다는 은행..요즘 피싱이 부른 황당 풍경
“보이스피싱 절대로 아니라니까요. 현금으로 꼭 찾아야 해요.”
지난 1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국민은행 휘경동지점을 찾은 50대 여성 A씨가 창구 직원에게 간곡히 호소했다. A씨는 “이사를 한 아들이 가구를 새로 사려 한다”며 “현금으로 구매하면 할인을 해준다기에 돈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A씨는 현금 4700만원을 인출하고자 했다. A씨의 거듭된 현금 인출 요구에 은행 직원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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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직원 설득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수법이 나날이 교묘해지면서 보이스피싱 피해자나 인출책 등을 대면하는 은행직원도 애를 먹고 있다.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당한 줄 모르는 피해자가 오히려 은행직원을 설득하며 돈을 인출하려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때로는 현금 인출을 막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국민은행 휘경동지점의 5년 차 직원 박한솔(23)씨는 지난 1일 현금 4700만원을 인출하려던 고객 A씨를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자칫 자신이 고객에게 인출해준 돈이 보이스피싱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A씨를 대면했을 당시 박씨는 보이스피싱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박씨는 “고객께서 현금을 찾는 이유도 나름 타당해 보였고 문진표 작성 결과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에 무턱대고 현금 인출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500만원 이상의 현금 인출 시 보이스피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작성해야 하는 문진표에서도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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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은행직원의 경찰 신고로 피해 막아
그러나 박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금을 찾는 과정에서 시간을 끌며 관할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해 관내 은행들과 핫라인을 구축해놓은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박씨의 설명을 듣자 곧바로 강력팀 형사들을 은행으로 출동시켰다. 계좌에서 인출한 현금 4700만원을 A씨에게 건네주기 직전이었다.
은행에 도착한 경찰은 A씨의 동의를 받아 휴대폰 메시지 내용을 살펴보고, 그의 아들과 통화를 시도했다. 결국 A씨가 보이스피싱에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A씨의 요구에 따라 인출한 현금 4700만원은 다시 A씨의 계좌로 입금됐다. 박씨는 적극적인 경찰 신고를 통해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은 공로로 지난 6일 서울 동대문경찰서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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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발휘해 인출책 검거에 기여하기도
‘눈치 100단’ 은행직원이 기지를 발휘해 보이스피싱 인출책 검거에 기여하기도 한다. 지난달 17일 오후 4시 경기도 용인에 있는 기업은행 수지점에서는 30대 여성 B씨가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역할을 하다가 직원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B씨는 ATM으로 무통장 입금을 반복하다가 기기 작동에 문제가 생겨 은행 직원의 도움을 받던 중 덜미를 잡혔다.
B씨의 요청을 받고 입금 과정을 도와주던 은행직원 김현구(23)씨는 당시 B씨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겼다. B씨 옆에 놓인 가방 안에는 대량의 오만원권이 들어있었고, 입금할 때마다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송받은 메시지를 보는 행동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입금을 돕는 과정에서 이상한 낌새가 보여 고객의 휴대폰을 살짝 들여다봤다”며 “카카오톡에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수십 개가 적힌 메시지가 보여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간을 끌며 ATM 거래내역을 통해 B씨가 100만원을 반복해서 입금하는 것을 확인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곧바로 경찰이 출동해 현장에서 B씨를 검거했고, 보이스피싱 피해금 1132만원을 회수할 수 있었다. 용인서부경찰서는 보이스피싱 예방과 검거에 기여한 김씨에게 지난 16일에 표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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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급증하는 대면 편취형 보이스피싱
한편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18일 보이스피싱·몸캠피싱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기 범죄를 2월부터 3월까지 2개월간 집중적으로 단속해 8076명을 검거하고 이 가운데 670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특히 최근 피해가 급증한 대면 편취형 전화금융사기 범죄를 집중 단속했다. 대면 편취형 전화금융사기는 범죄자의 거짓말에 속은 피해자가 현금을 찾은 뒤 직접 범죄자에게 전달하는 사기 수법이다. 경찰 관계자는 “전화나 온라인으로 입금을 요구하면 100% 보이스피싱이니 즉시 연락을 끊어야 한다”며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사이버사기도 당하지 않도록 유의해달라”고 당부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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