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투표 단상
얼마 전 모처럼 투표를 하러 갔다. 봄비가 많이 내린 주말 오전이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집에서 300m쯤 떨어진 주민센터에 투표소가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마스크를 쓰고 우산을 든 채 걸어가다보니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투표소 입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20여명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정제로 손을 소독하고 비닐장갑까지 착용한 뒤 들어간 실내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마스크를 살짝 내려 얼굴을 대조한 뒤 후보들의 이름이 적힌 긴 투표지를 받았다. 기표소에서 투표 도장을 찍고, 봉투에 담긴 투표지를 함에 넣는 것으로 서울시장 보궐선거 사전투표가 끝났다.
투표에 걸린 시간은 1분이나 될까. 막상 끝나고 나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투표는 생각보다 짧았다는 일종의 허무함, 마스크와 비닐장갑이 주는 불편함과 생경함, 평화로운 투표장의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유권자로서 나는 문득 투표소를 나오면서 ‘코로나19 이전 일상의 회복은 언제쯤 가능할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부터 했다.
‘샤이 진보’가 투표장에 나올까, ‘분노 투표’는 얼마나 될까 등의 여러 전망과 해석에서는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투표가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정권 안정이냐 정권 심판이냐와 같은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것일 수는 없을까. 적어도 2021년 4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어떤 위기와 대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그건 우선 코로나19 위기와 관련된 일상의 회복이다.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말은 ‘피로감’이다. 교수신문은 2020년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내로남불)’를 선정했지만 국민들의 솔직한 심정을 담는다면 ‘만성피로’ 정도가 어울릴 듯 싶다.
코로나19는 모든 이들의 일상을 덮쳤다. 영업 중단 조치가 길어지면서 자영업자들은 눈물의 폐업 대열에 서야 했다. 직장인들은 매일 마스크에 의존해 버스와 지하철에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며 불안감에 떤다. 날이 풀려도 공원에 나가길 꺼려하는 이들이 있고, 행여나 하는 마음에 ‘집콕’을 선택했던 이들은 여행객 때문에 확진자가 늘어났다는 뉴스에 분노하곤 했다. 정부가 장담한 대로 백신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것인지, 집단면역은 가능할 것인지는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일상을 지배하는 마스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날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다.
일상의 회복은 정치 영역에서도 필요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평정심의 회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동안 정치 영역을 지배한 건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눠진 광장의 정치였다. 정치권은 국민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열망을 동원했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시급한 현안 해결은 미뤄둔 채 서로 남 탓을 하기에 바빴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라는 말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냉철한 문제 해결의 정치가 사라진 곳에는 지지층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프레임만이 독버섯처럼 자랐다. 합리적 토론은 찾아보기 어렵고, 선동가들이 인터넷과 SNS를 지배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적 과열은 건전한 상식을 가로막고, 지친 국민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지 열흘 남짓 지났다. 여야가 선거운동 기간에 수많은 약속을 했지만 결과가 나온 이후 상황을 보면 변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정치권은 여전히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또 버거워한다. 그러는 사이에 국민은 점점 더 지쳐간다.
내년 봄에 찾아올 다음 투표에서는 그동안 빼앗겼던 일상의 회복이 얼마나 진전됐는지가 기준점이 될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비틀리고 망가졌던 우리네 일상을 한 방에 일으켜 세울 마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깊게 패인 상처를 치유하고, 국민이 만성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백상진 정치부 기자 shar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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