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정권 교체의 저주
홈런왕 이승엽은 겸손하다. 그는 홈런을 치고 누구처럼 유난스러운 몸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베이스를 돌았다. 언젠가 신인 투수를 상대로 큼지막한 홈런을 때리고 난 뒤에도 이승엽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훗날 “상대 팀 투수는 너무 젊었고, 내가 친 홈런은 너무 컸다”라고 회고했다. 이승엽이 ‘국민 타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 정치도 스포츠와 닮았다. 운동경기에 스포츠맨십이 있듯이 정치에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죽고 사는 문제가 되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변질됐다. 이기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데스 매치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 4·7 재보궐선거만 해도 그렇다. ‘생태탕으로 시작해 진흙탕으로 끝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 나쁜 선거’였다. 민주화가 진행된 지난 수십년 이래 이처럼 망가진 선거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집권 여당의 책임이 8할 이상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자기 당 소속 시장들의 성범죄 사건으로 치르게 된 선거인만큼 당헌 제96조 2항에 따라 후보자를 공천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선택’ 운운하며 전 당원 투표를 앞세워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것마저 유효투표율은 3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는 민주당 당규 제2호를 충족하지 못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무리수는 또 다른 악수를 두게 마련이다. 민주당은 대세를 뒤집기 위해 ‘사상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를 주도했다. 그것뿐인가. 부산 선거에 이기기 위해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을 밀어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안 통과 하루 전에 가덕도 공항 예정지를 찾아가는 등 노골적으로 관권선거를 획책했다는 의혹을 샀다. 그러고도 선거에 졌다. 아니 그것 때문에 졌을 것이다. 게도 구럭도 다 잃으면서 “패해도 참 더럽게 패했다”는 욕을 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야당이 잘한 것도 없었다. “막대기를 출마시켰다면 아마 표차는 더 컸을 것”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후보자들의 신상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선거 뒤 합당을 둘러싸고 지저분한 파열음이 나오는 걸 보니 ‘역시 그렇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민주화 30년이 지났는데 왜 한국 정치는 퇴보를 거듭하는가. 왜 갈수록 비루해지는가. 민주주의는 원래 쉬운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훌륭한 삶’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정치가 가능하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정치가 실망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정치의 기괴함은 유별나다. 4·7 선거의 몰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진영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퇴로 안전’이 위협받게 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하이에크도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런 ‘피 흘리지 않고 정부를 바꿀 수 있는 제도’가 위태롭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그런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장기간 감옥에 갇혀 있다. 문재인 정권은 정치 보복이라는 야당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제시한 기준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민이 클 것이다.
이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정권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리수, 꼼수, 악수 가릴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야당은 그 반대의 이유로 정권 탈환을 염원한다. 여야 할 것 없이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하는 원색적 이분법에 함몰돼 있다. 정권 교체의 저주가 아닐 수 없다. 시장 보궐선거가 이 정도인데 내년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권이 야당 쪽으로 넘어가면 또다시 적폐청산을 외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세상을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구획하는 케케묵은 세계관을 철폐하는 것이다. 정치의 상대방은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다. 국민을 섬기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경쟁자이다. 그제 경기를 보니 추신수도 홈런을 쏘아 올린 뒤 고개를 숙였다. 이런 품격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의 퇴로를 차단하면 자신의 미래도 담보될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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