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정의 시선] 이념 편식 86세대, 이병주『지리산』읽고 '이념 백신' 맞자
진영 갈등 심한 대한민국 자화상
사회주의 심취 지식인 고뇌 그려
이념 쏠린 86세대 균형 회복 절실
대한민국의 2021년 자화상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과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한 혼란기를 다시 보는듯하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혼란스럽게 충돌하던 위태로운 해방 전후의 축소판 같다. 그 시대를 그려낸 대표적 소설로 이병주(1921~1992) 작가의『지리산』과 조정래(78) 작가의『태백산맥』을 꼽을 수 있다. 두 소설과 두 작가의 삶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다. 시대 배경은 『지리산』이 1930년대부터 1956년까지고, 『태백산맥』은 1948년 '여순 반란 사건'부터 1953년 휴전 직후까지다.
해방 직후 이념 대립의 혼란상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공통적 시대 배경인 두 소설은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공통점도 있다. 『지리산』에는 항일 투쟁하다 사회주의에 심취하지만, 공산당에 의구심을 품은 박태영과 몰락한 지주 집안의 수재 이규가 대표 주인공이다. 반면『태백산맥』에선 지식인 출신 빨치산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하대치, 지주 집안 출신 김범우 등이 주요 주인공이다. 『지리산』이 이념의 폭력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 지식인의 고뇌를 시종일관 부각했다면, 『태백산맥』은 민중의 관점에서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과 분노, 한을 그려낸 점이 두드러진다.
두 작가 모두 한국사회의 이념 갈등에 휘말린 아픔도 있다. 이 작가는 국제신보(국제신문 전신) 주필 시절이던 1960년 월간 '새벽' 12월호에 쓴 '조국의 부재'란 글("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분단 이후 첫 구속 작가가 됐다. 부산 시절 술친구였던 박정희 소장이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조국의 부재'를 문제 삼은 필화사건으로 이병주는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태백산맥』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공산주의 혁명 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1994년 고소·고발된 조 작가는 11년간 이적성 시비를 겪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진보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무혐의 처분됐다. 조 작가는 최근에도 "작가는 진실만을 말한다. 난 근거 없는 건 절대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사후 16년만인 2008년에야 고향 경남 하동 북천에 '이병주 문학관'이 세워졌다. 반면 조 작가는 전남 보성군 벌교에 '태백산맥 문학관', 부친의 고향 고흥에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 전북 김제에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 등 3개의 문학관을 생전에 보유한 진기록을 세웠다.
혈기 넘치던 시절『태백산맥』에 영향받은 586세대가 지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면서 이념 갈등을 더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김봉군 가톨릭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태백산맥』에 대해 "가진 자는 모두 그르고 못 가진 자는 모두 옳은 것처럼 그렸다. 복잡한 인간과 인간사를 그렇게 단순화하면 오류가 생긴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어도 좋지만 '허구적 진실(fictitious truth)'을 담아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태백산맥』만 읽은 기성세대와 청소년은 『지리산』을 같이 읽어 이념 편식에서 벗어나 역사와 사회를 보는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염병이 창궐하니 코로나19 백신이 시급하다. 동시에 우리 시대는 '이념 백신'도 절실해 보인다. 때마침 지난 10일 하동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 이병주 문학 영호남 학술 세미나'가 열려 그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했다. 2006년 '이병주 기념사업회'(공동대표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김종회 전 경희대 교수)를 꾸릴 때 진보 성향 임헌영 문학평론가와 보수 성향 이문열 작가가 함께 참여할 정도로 "이병주 작가는 좌우의 용광로 같은 존재"란 평가를 받는다. 장남 이권기 경성대 명예교수는 "100주년을 맞아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가 『이병주 평전』을 발간할 예정이다.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지리산』 재출간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상기 하동군수는 "『지리산』을 다시 발간한다면 행정적으로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 이병주가 남긴 말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권력과 이념 지형은 한국사회 생태계에 해롭다. 견제와 균형을 통한 건강함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태백산맥』과 『지리산』을 함께 읽음으로써 더 균형 잡힌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념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한걸음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재명 때린 김부선 "쌀 한가마니라도 보내야 남자 아니냐"
- [단독] 이상직 "난 불사조, 어떻게 살아나나 봐라" 큰소리
- "수유동 악마…길 가던 여성 납치해 사흘간 모텔 감금·성폭행"
- [단독]고민정에 밀린 與 인사, 기업은행 자회사 낙하산 논란
- 진중권 "태영호만 제정신이다…'이대녀'를 보는 여야의 착각"
- 청와대 간 오세훈·박형준 "두 전직 대통령 사면 건의"
- '사면론'에 일침 날린 野청년 "이러니 학습능력 떨어진다고"
- 시어머니 젖 먹이는 며느리···중국 발칵 뒤집은 돌조각상
- 쌀밥에 깍두기만...휴가 후 격리된 병사 "감방과 뭐가 다르죠?"
- 오세훈·박형준 초대한 문 대통령 "곧바로 취임, 나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