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위에 그린 그림..모든 건 순간일 뿐, 무엇을 잡으려 하나

나원정 2021. 4. 1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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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아트' 작가 프로보이닉
먼지 쌓인 트럭 그림으로 주목
한국 영화 '더스트맨'에도 참여
러시아 작가 프로보이닉(사진 오른쪽)과 그가 한국 영화 ‘더스트맨’ 촬영 당시 먼지 쌓인 트럭에 다시 그린 ‘기도하는 손’. [사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먼지에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있다. 캔버스는 먼지 쌓인 자동차나 창문. 도구 없이 손가락질 몇 번이면 파도가 치고 새가 날아든다. 시간이 지나면 비바람에 자연히 씻겨 사라진다. 거리 예술의 일종인 ‘더스트 아트(Dust Art)’, 일명 먼지 예술이다. 미국·유럽 등 서구에선 작가들이 느는 추세다.

“먼지 예술은 내가 만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간 것은 보내고 새로운 작품에 임하는,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죠.”

주로 먼지 낀 트럭에 그림을 그리는 러시아 작가 프로보이닉(ProBoyNick·40)이 지난 8일 e메일로 들려준 얘기다. 본명은 니키타 골루베프. 모스크바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는 한 TV 채널이 먼지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찍은 영상이 큰 관심을 끌며 SNS상에서 주목받았다.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다”는 그는 “실험예술을 좋아하는데 2017년 큰 스케치를 빠르게 그리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보고 싶어, 먼지 낀 표면에 그려보게 됐고 지금은 가장 성공적인 작업이 됐다”면서 “추한 잿빛 먼지에서 아름다움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제게는 큰 기쁨이자 영감이다. 익숙지 않은 형태의 예술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Q : 먼지 예술만의 매력이라면.
A : “먼지는 어떨 때는 건조한데 어떨 때는 습하고, 또 어떨 땐 얼어있기도 하다. 두께도 매번 다르다. 다음 작품을 완벽히 확신할 수 없고, 오히려 그래서 자유롭기도 하다. 수정이 불가능하고 디지털 작업처럼 되돌리기 버튼을 누를 수도 없다.”

Q : 예명 ‘프로보이닉’의 뜻은.
A : “러시아어로 구멍 뚫는 데 쓰는 큰 못이란 말인데, 영어로는 저를 나타내는 3개 단어를 조합했다. 친구들이 저를 부르는 닉(Nick), 제가 하는 일이 전문적이란 뜻에서 프로(Pro), 아직 소년이란 의미의 보이(Boy)다.”

그는 최근 먼지에 그림 그리는 노숙자 청년을 담은 한국영화 ‘더스트맨’(7일 개봉)에도 참여했다. 각본을 겸한 김나경 감독이, 그가 트럭 화물칸에 그린 먼지 그림 ‘기도하는 손’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고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구상해 이번 장편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가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기도하는 손’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린 작품이란다. 영화에선 가족을 떠나온 태산(우지현)이 자신처럼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어느 트럭 운전사 아들을 위로하며 그린 그림으로 나온다.

올빼미를 그린 작품. [사진 트리플픽쳐스]

김나경 감독의 초대로 3년 전 처음 한국에 와 영화 속 그림 일부를 그렸다. ‘기도하는 손’ ‘마주한 손’ ‘모아와 숲’ 등이 그의 작품. 프로보이닉은 “제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 큰 영광이었다”면서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김 감독이 결정했고 모스크바에서 디지털 스케치를 만들어가 촬영장에서 실제로 그리고 배우들에게도 방법을 알려줬다”고 했다. “태산과 미대생 모아(심달기)가 터널 앞에서 지워진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마치 제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았다. 김 감독이 먼지 예술의 중요한 본질을 아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붙잡으려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 말이다.”

최근엔 일본 목판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카나가와의 높은 파도 아래’를 재해석한 먼지 그림을 완성했다는 그는 “지금 모스크바는 먼지가 많은 계절인데 여름이 될 때까지 몇 작품 더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더스트맨’이 러시아에서도 출시되면 좋겠다면서, 비행기로 9시간, 자신의 최장 거리 여행 경험이 된 한국의 추억도 곱씹었다. 그는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돼 있는 작은 강가(청계천)도 구경했다. 김밥과 만두와 사랑에 빠졌다”면서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고, 전 세계가 열려서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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