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섬, 그곳에 삶이 있다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노희정 화백이 그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섬, 도시의 '노스탤지어 ; 그리움' 남촌도림동이다. <기자말>
[글 정경숙, 사진 임학현]
▲ 언덕 위의 집 53x33.3cm Watercolor on paper(2000년). 남동구 개발제한구역은 순도 100%의 자연을 품고 있다. 흙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언덕 위 낮은 집 그리운 고향 풍경이 펼쳐진다. |
ⓒ 노희정 |
봄이 무르익었다. 인천 남동구 수산동의 한 농가 비닐하우스에도 작물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토마토가 싹을 틔운 지 이제 두 달. 꽃망울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농부의 마음은 분주하다. 며칠 후 꽃이 피면 벌들을 풀어놓고, 줄기를 바로 세우고, 겹 순도 계속 따줘야 한다.
▲ 공진균, 방옥애 부부. 그들 꿈이 자라는 온실은, '첨단자동화 온실 설치 시범사업'으로 인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원받았다.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그가 태어나 살고 있는 '찬 우물', 냉정마을은 곡부공씨(曲阜孔氏) 어촌공파(漁村公派)의 집성촌이다.
"한 가족인데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었겠어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시제(時祭)를 올리고, 어르신 생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열었지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도 품앗이로 지었어요."
▲ 공진균, 방옥애 부부. 그들 꿈이 자라는 온실은, '첨단자동화 온실 설치 시범사업'으로 인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원받았다.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개발의 강풍에서 비껴간, 도시의 섬. 길이 없으니 차도 다니지 않았다. 30여 년 전, 아내는 털커덩털커덩 경운기를 타고 경기도 화성에서 이 마을로 흘러들어왔다. 방옥애(58)씨는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며 농부의 아내로 살아갈 생각에 마음 조였다. 하지만 자연의 들숨과 날숨에 호흡을 맞추며 살아온 세월. 흙이라곤 만져본 적 없던 새댁은 땅과 맞대어 살아가는 베테랑 농사꾼이 됐다.
"내 땅에서 짓는 농사잖아요. 힘들어도 보람돼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이제 고향이잖아요."
▲ 봄의 소리 55.2x35.5cm Watercolor on paper(2000년). 봄 햇살이 겨울의 빗장을 연, 남촌도림동의 배 농장 풍경. 사월이면 순백색 꽃눈이 흩날리고, 가을이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
ⓒ 노희정 |
▲ 배나무 유인 작업 중인 서명찬씨. 가을을 기다리며, 농사꾼은 오늘도 나무를 가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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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촌동 옛 4번 버스 종점 모퉁이 버려진 땅에 주민들이 가꾼 꽃밭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남촌동(南村洞) 옛 4번 버스 종점. 마을에서 하나뿐인 버스가 종일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지친 몸을 뉘던 곳. 그 안엔 600살 먹은 은행나무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굴곡진 시간을 묵묵히 견뎌왔을 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사랑한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칠월이면 당제(堂祭)를 지낸다. 어느 해 여름 태풍으로 나무가 쓰러질 뻔했을 땐 주민들이 비비람 속에서 나무를 지켜냈다.
"어릴 땐 동네 사람 모두 이 나무 그늘에서 여름을 났어요. 그네 타고 윷놀이하며 어울려 놀았죠. 행복했던 기억을 오늘 되살리는 게 도시재생의 시작입니다."
▲ 남촌 주민협의체 '십시일반'의 김채언 회장(오른쪽)과 최경애 사무국장(왼쪽). 주민이 함께 그린 벽화 앞에서.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힘을 모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인생이라는 길. 남촌 사람들은 서로 보폭을 맞추고 따뜻한 두 손을 맞잡으며,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십시일반'의 최경애(57) 사무국장은 남촌 토박이다. 학창 시절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학교에 가기 위해 논밭 사잇길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선생님들이 대체 넌 어디 살기에 신발에 흙을 잔뜩 묻히고 다니느냐 물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남촌...'이라고 답했다.
▲ '우리 동네 홍 반장' 이재선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이 꾸민 빌라 벽면 한편엔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이재선(77) 할아버지는 동네 일이라면 무엇이든 언제든 발 벗고 나서 '우리 동네 홍 반장'으로 통한다. 그는 충청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평생 일만 하다, 나이 들어 인천으로 왔다. 청학동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살다, 그 집 팔아서 아들 장가가는 데 보태주고 홀로 남촌 빌라촌으로 왔다. 후미진 골목까지 햇살이 닿는 이 동네는, 온 힘을 다해 살아온 그의 삶을 끝까지 어루만질 것이다.
▲ 남촌 풍경 18x14cm Oil on canvas(1995년). 1990년대 개발의 바람이 불기 전 남촌의 전원 풍경. 주민 중심의 '도시재생'으로 남촌에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
ⓒ 노희정 |
주민공동체 '꽃 피는 남촌 두레'의 공병화(62) 회장은 그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 있었다. '아, 이제 우리 동네도 바뀌는구나.' 1990년대 '깡촌' 남촌동에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아쉬움을 뒤로하고 앞날을 기대하기도 했다. 현실은 달랐다.
"그때 집들이 제대로 지어졌으면 좋았으련만.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라, 개발업자에 휘둘려 날림으로 집을 올리고 땅도 제값에 넘기지 못했어요. 그러다 건물이 노후화되고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떠나갔지요. 동네에 온기가 사라져갔습니다."
봄은 다시 왔다. 2019년 인천도시재생지원센터의 '원도심 도시재생 주민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 남촌은 '주민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사업'이 한창이다. 주민들은 그동안 도시재생대학에서 마을의 앞날을 고민하고, 신문을 만들어 동네 소식을 전하고, 두부를 빚어 이웃과 정을 나눴다. 작지만 큰 변화.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그들이 내다보는 미래다.
▲ 남촌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청호는, 작가의 집이자 작업실이다. 그 앞 벽화는 주민들이 함께 그렸다.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섬 같은 마을이다. 섬은 생각하게 한다.' 동화 작가 함영연(57)은 남촌을 섬이라 부른다. 마음의 온도를 딱 알맞게 보듬어 안으며 작가로 살게 해주는 동네가 고맙다. 강릉, 파도가 파랗게 달려드는 동쪽 바다에서 인천, 잔잔한 서쪽 바다로 왔다. 창 밖으로 논밭이 내려다보이는 지은 지 30년 된 오래된 아파트에서 10년을 보냈다. 글 쓰고 또 글을 쓰고 책을 내고, 미동도 없이 고요히 흘러간 시간이었다.
▲ 동화 작가 함영연은 방정환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우수 콘텐츠 선정작인 저서 <석수장이의 마지막 고인돌>을 들고, '남촌어울림커뮤니티센터' 도서관에서. |
ⓒ 임학현 포토그래퍼 |
▲ 인천 스케치 그림을 그린 노희정 작가 노희정은 인천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다. 194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 네 살부터 인천에 살며 창영초, 인천중, 제물포고를 거쳐 서라벌예대를 졸업했다. 중학생 시절 처음 붓을 잡은 그는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작품인 '면面'을 비롯해, 사라진 소래 협궤 열차 길을 그린 '흘러간 세월의 노래', '인천역 내려가는 길', '홍예문' 등 인천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을 특유의 감각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 인천원로작가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와 인천미술협회. 인천구상작가회, 아라회 등 다양한 미술 단체에서 고문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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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1년 4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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