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읽다]MIT의 '피아노 부수기', KAIST의 '괴짜 총장'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지난달 취임한 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임 총장은 여러 모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한국 최고의 고등 과학교육기관의 수장 자리에 권위와 기존 관습 보다는 자율과 창의ㆍ도전 정신을 중요시하는 '괴짜 교수'가 임명됐습니다. KAIST의 미래ㆍ융합 교육을 선도했고 김정주 NXC 대표 등 1세대 벤처 창업 대표주자들의 스승 역할을 했던 학자라는 점도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선진국들을 베끼고 따라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수준에서 벗어나 퍼스트 무버(first mover)나 트렌드 세터(trend setter) 자리로 치고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자율과 창의, 도전 정신을 강조하는 교육자가 주요 동력인 과학ㆍ기술인 양성 기관을 책임지게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쓴 소리'에 가깝습니다. 이 총장이 취임하면서 교육 방침이 겉으로는 파격적이고 자율ㆍ창의ㆍ도전 정신을 키운다고 하지만, 실제론 1970~80년대 '새마을운동'식 즉 '꼰대'들의 방식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총장은 지난 8일 취임 후 첫 간담회에서 임기 내 포부와 교육 철학ㆍ개혁 방안을 설파했습니다. 기대가 되는 것들이 많았죠. 이 중 "교수들에게 성공 확률이 80%가 넘는 연구들에는 연구비를 지급하지 말라고 했다"는 방침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도전적인 연구에 나서달라'는 취지로 읽힙니다. 이 총장은 또 KAIST 학생들에게 공부를 좀 덜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한다. 10% 정도 줄여야 한다. KAIST의 바틀넥(Bottle neckㆍ병목 현상)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긴장이 돼 있다는 것"이라며 "교수나 학생들이 긴장을 좀 늦추고 하늘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꿈을 꿔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제가 됐던 연구 윤리 문제에 대해서도 강력한 개혁 방침을 시사했습니다. KAIST에선 지난해 한 교수가 중국 정부의 '천인' 프로젝트에 참여해 산업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는 등 연구 윤리 문제가 발생한 바 있습니다. 이 총장은 "취임 후 곧바로 청렴위원회를 구성해 가동 중"이라며 "과거 연구실마다 있었던 랩비(연구비를 빼돌려 불법 조성한 활동 자금)가 아직도 있는 지 모르겠다. 완전히 없애도록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총장은 이와 함께 이날 간담회에서 '질문'(Question)하는 학생, '연구 혁신'(Advanced research),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기술사업화'(Start-up), '신뢰'(Trust) 문화 등을 키워드로 하는 QAIST 신문화 전략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인성과 리더십 교육을 통해 성적 지상주의를 타파하고,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도록 실패연구소도 만들겠다"면서 "이제는 '따라가는' 연구가 아닌 무엇을 연구할까를 생각해야 할 때다. 4년 동안 미래 연구 분야 교수진 100명을 확보해 인공지능(AI)을 넘어서는 포스트 AI 연구를 준비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괴짜 교수'라는 별명 답게 학계의 기존 관습에 비해 파격적인 언급들이 많죠? 이 총장은 특히 이날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MIT)를 뛰어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삼성이 30~40년 전에 소니를 이기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총장의 이같은 교육철학ㆍ목표를 두고 우려도 나옵니다. 특히 '창의', '자율', '도전'을 강조한다면서도 1랩1독서, 1랩1창업, 1랩1외국인, 1랩1세계최초연구 등 실천 방식을 내놓은 것에는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이 펼쳤던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킨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덜 하면서,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자율적이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하라면서, 연구실당 목표와 과제를 강제로 할당하다니 논리적으로 충돌이 발생하네요.
그리고 이런 식의 '운동'에는 항상 막대한 관리 비용이 투입되게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성과를 챙기고, 독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과 교수 등에게 부담만 커지지 않겠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이 총장은 이에 대해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창업 같은 경우는 어려운 분야에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면서도 "일단 일을 벌려야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교수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교수ㆍ학생들을 만나 토론회를 해가면서 공감대를 이뤄 가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총장이 뛰어 넘겠다고 한 MIT에는 유명한 전통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성적표에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수업을 포기할 수 있는 마지막 날 기숙사 옥상에서 피아노를 던져 깨뜨리는 '놀이'입니다. 1972년 한 학생이 "기숙사 건물 밖으로 피아노를 던져서 파편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싶다"며 장난스럽게 던진 제안이 놀랍게도 학교의 공식 승인을 거쳐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네요. 학생들에게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미친 짓을 해도 된다'는 자신감, 또 실패는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자산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다양한 시도 그 자체를 즐기라는 격려로 다가간답니다. 이처럼 학생들을 존중해주는 학풍은 '안 되면 말고' 식의 가벼움으로 비칠 수 있지만 결국은 어떠한 난제라도 돌파할 수 있는 창의성으로 이어져 MIT의 뛰어난 학술적 성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KAIST를 포함한 기존 한국의 연구 현실은 어떤가요? 세계 최초로 초소형 초경량 무절연 초전도자석을 발명해 '4월의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한 한승용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MIT에서 13년간 공부했다는 한 교수는 최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연구실에선 여전히 자율과 창의, 도전보다는 성과, 결과물을 중시한다고 쓴소리를 던졌습니다. 그는 "한국의 학생들은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생각해냈더라도 그 길의 끝에 있을 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저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한국은 과거의 추격형 연구를 탈피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피아노를 던지는' 자유로운 연구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피아노를 부수는 MIT, 그리고 MIT를 이겨보겠다며 KAIST가 내세운 '1랩1△△' 운동. 겉으로는 교수ㆍ학생들의 자율ㆍ창의ㆍ도전적 연구를 장려한다는 목적은 같은 것 같습니다만, KAIST의 '1랩1△△' 운동이 과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일단 '꼰대' 냄새가 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지켜 보시죠.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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