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OO역이지? 집 안가?" 몇시간째 날 지켜본 '그놈'의 문자
'김태현'은 어디에나 있다
스토킹 피해자들의 이야기 제66화>
왁자지껄한 주말 저녁, A씨(29)가 친구들과 즐겁게 술잔을 주고받습니다. 자리가 무르익는 도중 A씨 휴대전화가 울립니다. '엄마인가?' 무심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A씨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습니다.
"너 OO역 근처지? 지금이 몇신데 집에 안 들어가?"
발신인은 2년 전 동호회에서 만난 B씨. A씨와는 딱 한 번 만난 사이입니다. 친구도, 애인도 아닌 B씨가 외출 나온 그를 몇 시간 째 지켜보고 있던 겁니다. 두려움에 떨던 A씨는 결국 자신의 집이 아닌 친구 집으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평범한 여성이 지난해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 1년여간 이어진 B씨의 집요한 스토킹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죠. 결국 서울 밖으로 이사도 갔습니다.
그러다 최근 A씨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다. 서울 노원구에서 자신이 스토킹하던 여성과 그 일가족을 살해한 '김태현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죠. A씨는 밀실팀에 "그저 운이 좋아서, 피해자인 내가 도망쳤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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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 중 1명,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스토킹은 유명 연예인이나 극소수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2019년 KBS 공영미디어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답은 '아니오'에 가깝습니다. 설문 결과 '직접 스토킹을 당해 본 적 있다'고 답한 사람은 10명 중 1명(11.1%)이었습니다. 여성(13.5%) 피해자가 좀 더 많지만, 남성(8.6%)도 적지 않습니다.
밀실팀은 김태현 사건을 계기로 피해 여성 두 명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들도 평범한 이웃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김태현'도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직장인 이예지(27)씨는 지난해 10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이씨는 "남자친구 있느냐"고 묻던 남성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2주 뒤 같은 장소에서 이씨를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남성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이씨를 30분 동안 쫓아다녔습니다. 일반적인 구애를 넘어선 스토킹이었죠. "왜 나를 무시하냐. 왜 나를 싫어하는 거냐" 도리어 그는 자신이 불쾌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씨를 놔주지 않던 이 남성은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씨는 "그날 만난 사람 외에도 구애를 거절했을 때 불쾌해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관심을 표한 것뿐인데 왜 과민반응하느냐'며 억울해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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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장소 안 가리는데 단순 애정 공세?
스토킹이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을까요. 그래도 피해자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립니다.
A씨는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알아낸 B씨와 마주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장미꽃을 들고 기다리던 그의 모습이 악몽처럼 각인됐습니다. 결국 불안 장애가 나타나 그날 이후 직장을 한 달 가까이 쉬어야 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스토킹은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납니다. A씨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B씨를 차단하고, 페이스북 등 SNS 계정도 삭제했습니다. 이제 연락이 안 올 거라 안도하던 찰나, 또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A씨의 음원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 ID를 알고 있던 B씨가 메시지 기능을 활용해 연락한 겁니다.
"너도 나 좋아하잖아. 왜 안 만나줘?"
스토킹을 겪는 이들은 철저한 '을'입니다. 오히려 가해자가 더 당당할 때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스토킹을 '애정 관계에서 일어난 가벼운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 탓에 신고조차 망설입니다.
A씨는 멀리서 꽃을 들고 기다리는 B씨를 보고 경찰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출동한 경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저분이 좋아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냐"며 농담까지 건넸죠. 경찰은 B씨에게 범칙금을 부과했습니다. 그게 끝이었죠. 이 일로 A씨는 '경찰에 알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추가 신고를 단념하게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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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법 생겼지만 "이제 시작일 뿐"
22년. 스토킹처벌법이 1999년 15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후 지난달 24일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그동안 스토킹은 경범죄로 분류돼 범칙금 8만원을 내는 게 전부였습니다. 피해자의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범죄가 장난 전화 수준으로 여겨진 거죠.
스토킹처벌법은 스토킹 범죄를 '피해자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반복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하거나 따라 다니거나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 등으로 정의합니다. 오는 9월 법이 시행되면 가해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법원이 가해자의 접근 금지 등을 명령할 수도 있죠.
스토킹을 무겁게 처벌할 수 있는 문이 열렸지만, 아직 갈 길은 멉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처벌법에 나온 스토킹의 정의가 추상적이고 협소한 면이 있다. 스토킹은 창의적인 수법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더 포괄적인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서 이사는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기관이 스토킹 범죄에 맞는 매뉴얼을 정확히 갖추고, 이에 대한 감수성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누군가에겐 끈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끔찍한 고통의 방아쇠가 되는 속담. 스토킹 피해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내용입니다.
스토킹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딘 인식, 이제 정말 바꿔야 할 때 아닐까요. 노원구 세 모녀의 비극도 지난해 김태현의 스토킹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데서 시작됐으니까요.
박건·백희연 기자 park.k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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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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