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바람이 내 삶을 조각내도"..정신장애인 밴드가 꿈꾸는 '틈'[소나기]

박은주 2021. 4.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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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콩나물밴드, 10년만의 첫 신곡 작업기
40~60대 중증 정신질환자 4명으로 구성된 '콩나물밴드' 멤버들이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의 연습실 앞에서 악기를 들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조장현(53·베이스), 박찬기(41·일렉기타), 이경오(64·바이올린)씨. 앞줄 가운데 이기탁(54·보컬)씨. 최현규 기자


어느 날 시작된 환청은 4개의 삶을 조각냈다. 가족과 유학길에 올랐던 바이올린 전공생은 쫓기듯 귀국해 혼자가 됐고, 병원 직원이던청년은 거꾸로 환자가 됐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평소처럼 직장에 다니다 한순간 병실 신세가 되기도 했다. 환청·환시를 겪었던 40~60대 중증 정신질환자 4명으로 구성된 ‘콩나물밴드’(콩밴)의 이야기다.

결성 후 첫 자작곡이 나오기까지 꼬박 10년. 이들은 지난달 29일 신곡 ‘틈’으로 대중 앞에 섰다. 카피곡으로는 1년에 40회씩 무대에 섰던 베테랑 밴드지만, 유명 음원사이트에 밴드명으로 된 곡을 등록한 건 처음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벌써 다음 곡 작업에 돌입했다는 이들을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의 연습실에서 만났다.

10년 만의 첫 자작곡…“마음의 ‘틈’ 내주길”

수원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행궁동 공방거리’의 한 건물 지하 1층. 콩밴 멤버 이경오(64·바이올린) 이기탁(54·보컬) 조장현(53·베이스)박찬기(41·일렉기타)씨는 매주 금요일 이곳에 모인다. 사단법인 ‘여함’에서 제공하는 콩밴 연습실이다. 그동안 주로 해왔던 대중가요 카피 작업도, 첫 자작곡 연습도 모두 여기에서 이뤄졌다.

콩밴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먼지가 되어’ ‘내 사랑 내 곁에’ 등 기존 곡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공연을 앞두고 유명 곡을 밴드 음악으로 바꾸는 식이었다. 콩밴만의 곡이 나온 건 지난해 2월, 11년 차 음악치료사이자 인디밴드 ‘입술을 깨물다’의 멤버 문현호씨를 만난 뒤였다. 문씨는 안병은 정신과 의사 소개로 콩밴의 신곡 작업에 합류했다.

연습실에서 만난 '콩나물밴드' 멤버들. 최현규 기자


문씨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지 멤버 모두에게 글을 써 달라고 했다”며 “A4용지 28장 분량의 글을 받았다”고 했다. 멤버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질환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다가도 삶이 아름답다는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밝음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문씨는 “마음이 너무 아픈데 어떻게 밝은 곡을 써야 하나 고민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진짜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삶이 정말 아름다우세요? 정말 살 만한가요?”

문씨의 질문은 노래 가사의 첫 줄이 됐다. 이후 멤버들의 글에서 괜찮은 문장을 뽑아 가사를 완성하고 멜로디를 붙였다. 곡 중반에 나오는 바이올린, 일렉기타 솔로는 경오씨와 찬기씨가 직접 썼다. 노래 제목은 ‘틈’으로 정했다. 문씨는 “마음의 틈을 조금만 열어 달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콩나물밴드의 첫 자작곡 '틈'의 커버. 밴드 제공

사흘 걸려 ‘1곡’…“앨범이 목표”

멤버들이 호흡만 잘 맞추면 되는 공연과 녹음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한 박자와 음정이 요구됐다. 문씨는 “녹음할 곡은 1곡이었지만 지인에게 부탁해 녹음실을 사흘 내내 빌렸다”며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작 녹음실에서 여과되지 않은 소리를 들었을 때 과연 곡을 완성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고 했다.

방역수칙 때문에 멤버 전원이 모이기 어려워 연습량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약 부작용이 더욱 발목을 잡았다. “약(기운)이 강할 땐 집중하기 힘들어요.”(조장현) “외우기도 어렵고요.”(이기탁) 문씨는 “약을 장기간 복용하면 피치 못하게 기억력이 흐릿해질 때가 있다”며 “노래나 연주는 상당히 세밀한 표현이 필요한데 몸의 움직임이 투박해지다 보니 녹음할 때 부족한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곡을 음원사이트에 등록했다. 대중의 반응을 확인했느냐는 질문에 문씨는 “악성 댓글이 두려워 차마 못 봤다”고 답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멤버들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농담을 시작했다. “누가 ‘싫어요’ 하나 눌렀던데요? ‘좋아요’는 16개.”(박찬기) “아니야, ‘좋아요’ 28개예요.”(이경오) “아, ‘좋아요’ 늘었어요?”(박찬기) 한바탕 웃고 난 이들에게 그럼 주변 반응은 어땠냐고 물었다. 기탁씨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동생이 ‘오빠, 멋있어’ 그러더라고요.”

콩밴은 요즘 다음 곡 작업에 한창이다. 이번에는 최대 5곡이 담긴 앨범을 계획하고 있다. 문씨가 몸담고 있는 밴드의 연제홍씨, 김희남씨도 힘을 보탰다. 연씨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밴드의 정체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곡만으로도 보편적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연습실이 있는 경기도 수원의 '행궁동 공방거리' 앞에서 만난 '콩나물밴드' 멤버들. 최현규 기자

“우린 여기 있어요, 함께해요”

찬기씨는 2000년대 초, 나머지 멤버들은 1990년대 처음으로 환청·환시를 겪었다. 유학 중에, 직장을 다니다가, 군에서 등 발병 장소는 다양했지만 원인은 모두 극한의 스트레스였다. 그때만 해도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바로 병원을 찾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현씨는 “전날 친구들하고 듣던 음악이 다음 날 TV에서 들리더라. 그때부터 시작이었다”며 “1년간 방치하다가…그게 참 실수였다”고 했다.

“제대 후 복학해야 하는데 더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가족에게도 안 알리고 돈 한 푼 없이 떠났죠. 3개월간 서울에서 전북 정읍까지 걸었어요. 한 교회 권사님을 만나 결국 집으로 갔지만요.”(박찬기)

방황하던 멤버들은 수원시 정신보건센터(현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처음 만나 밴드를 이뤘다. 초기부터 함께한 경오씨와 찬기씨는 몇 번의 멤버 변동을 겪었고, 기탁씨와 장현씨가 각각 7년 전, 5년 전 합류했다. 콩나물이 시루에서 함께 자라듯 음악을 통해 동반 성장하자는 뜻에서 밴드명을 콩나물밴드로 정하고, 복지센터나 주민센터 등 여러 기관 행사에서 공연하고 있다. 밴드 활동만 하는 건 아니다. 저마다 바이올린 강사, 바리스타, 동료지원 활동가, 영업직 사원 등 본업에도 열심이다.

멤버들에게 음악은 기쁨이고 위로라고 했다. “병이 심할 때는 집에만 있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음악 듣는 것밖에 없었어요. 음악이 절실했죠.”(조장현) 인격적 성숙을 도운 것도 음악이었다. “밴드는 내 소리를 줄이고 상대의 소리를 듣는 게 중요해요. 음악적으로 성숙하면 어떤 상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요.”(박찬기) 무엇보다 밴드 음악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라서 가능한 활동이다. ‘틈’의 가사처럼 ‘소리 바람’(환청)이 자신들을 조각내도, 콩나물이 ‘빛이 없이 자라듯’ 어둠 속에서나마 성장하고 있으니, ‘여럿이 함께하자’고, ‘우린 여기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몰랐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 장애인이라는 팻말이 붙어 다니더라고요. 약간은 우울하고, 드러내기 싫은 이야기들. 그것들이 콩밴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좋겠어요.”(이기탁) “제가 음악치료를 시작한 건 음악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편견이나 혐오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제일 좋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음악을 통해 다가오는 목소리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 주시고, 마음의 틈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문현호)

<콩나물밴드-틈>

삶이 정말 아름답나요, 살만한가요
소리 바람은 매일 나를 조각내고
상처투성이 떨어진 열매
마음은 쓰리고 몸도 점점 시들어가요
깨어 있어도 잠 들어있어도 미로 같아요

고통이 가는 길 (손대면 덧나도)
슬픔이 가는 길 (잊으려 애써도)
내가 가는 길 (모른 체하여도)
빛이 없이 자라고 있었어요

다름이 당연하다고 해요 아픔을 이해한다는데
그대 얼굴은 왜 그리 떨리나요
알아요 내 하루는 이미 너무 변해버렸어요
어둡고 차가운 시루 속 그 안에서

아마 새로운 세상은 그때부터였나
마른 외침 속에서 상처가 아물고
어느새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어
하얀 다리를 뻗고 있었어요

끝까지 아픔을 (사랑하려 해요)
때로는 그대의 (힘이 되고 싶어)
열어가요 (우리들의 자리)
맘을 두고 모두가 살아갈 틈
여럿이 함께해요. 우린 여기 있어요.
여럿이 함께해요. 우린 여기 있어요.

[소나기]소한, 와 당신의 이야. 거센 비바람에 지쳤을 때, 잠시 쉴 곳이 필요할 때 들러주세요. 당신과 꼭 닮은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다독여 줄 거예요.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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