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받아 집 샀더라면 내 삶은 많이 바뀌었을까

박지은 2021. 4. 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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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모] 요즘은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박지은 기자]

 서울의 한 주택 밀집지역. 다세대 주택 너머로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있다.
ⓒ 이희훈
 
첫 신혼집은 서울시 목3동, 시장 옆 낡은 다세대 주택 2층의 투룸이었다. 10평이 조금 넘었던 그곳은 불투명 미닫이문을 기준으로 주방, 거실과 안방으로 나뉘었다. 어린 신혼부부는 매일 입안에 설탕이 가득 묻은 꽈배기를 하나씩 물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을 봐와 작은 주방에서 소꿉놀이하듯 밥을 지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면 후딱 치우고 천장이 낮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매트리스뿐인 침구에서 편안히 서로에게 기대 잠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그 공간이 좋았고 앞으로 꾸려나갈 우리만의 가정을 생각하면 그곳이 어디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 년 뒤, 첫 아이를 낳고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시장은 소소히 데이트하고 장보기는 괜찮았지만 늦게까지 소란스러웠고 근처에 안전하게 아이와 산보할 수 있는 공원 하나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와 지내기에 집이 좁았고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건물 때문에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기 좋고 서울보다 집값이 싸다는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사실 집값이 싼 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었다. 우리 손엔 투룸의 전세금 삼천만 원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다음 집도 다세대 주택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로는 '거의 1층이나 다름없는 반지하'였던 이 집은 여전히 빛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살던 곳에 비해 생활 면적이 두 배 이상 넓었고 방도 세 개였다. 지척에 공원 숲이 있었고 바로 앞이 어린이집이었다. 장판과 도배도 새로 해 이 금액에 이 정도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첫째가 걸음마를 떼었고 말문이 트였다. 아이가 육 개월이 되자 바로 앞 어린이집을 다녔고 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아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근무 시간이 유동적인 학습지 교사 일을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권유로 보육교사 자격증을 위한 교육기관도 같이 다녔다.

그즈음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나와 자영업을 시작하여 보증금에서 일부를 빼 월세로 전환했다. 투자라 생각했다. 많은 계획을 세웠고 그 중엔 얼른 돈을 모아 가까운 빌라로 전세를 얻어 이사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가 돌이 막 지났을 때, 둘째를 임신했다. 반가웠지만 막막했고, 두려웠지만 둘이 같이 자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계획을 조금 수정하거나 미루었고 둘째가 태어났다.

산후조리원은 내 형편에 너무 비쌌고, 첫째를 같이 돌 볼 수 없어서 하루에 4시간씩 2주간 산후조리사가 집에 와서 도와주기로 했다. 나이가 지긋한 산후조리사가 계단을 내려와 반지하인 우리 집 현관을 열었을 때 내뱉은 첫 마디가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가슴에 남았다. "이런 데도 사람이 사네!"

새로 지은 국민임대아파트

첫 아이가 3살, 둘째 아이가 생후 1개월 때 파주 신도시로 이사 왔다. 새로 지은 국민임대아파트였다. 아파트는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이 컸다. 이십 평짜리 집엔 방이 두 개, 화장실이 하나였는데, 현관 옆 작은 방은 남편이, 안방은 나와 아이들이 쓰기로 했지만 사실 네 식구가 엉기어 생활했기 때문에 모든 방이 모두의 공동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앞은 대로였고 뒤는 반도체 공장이었지만, 새집이 주는 쾌적함이 남달랐고, 8층이어서 복도에 나가 밖을 내다보면 반도체 공장 너머 너른 들판과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노을이 지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아마 그래서 아파트 이름도 '노을빛 마을'이었나 보다.

이곳에서 십 년을 살았다. 대체로 좋은 날들이었다. 좋은 이웃을 사귀었고 아이들은 풀처럼 무럭무럭 자라났다. 여름이면 집마다 현관을 열어 놓아 같은 라인에 사는 아이들이 복도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았다.

언니 동생 하며 저녁 반찬을 나누어 먹고 매일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부부 싸움이 커지면 나는 옆집 언니 집에 가서 울었고 언니는 우리 집에 와서 시댁 흉을 보았다. 서로의 택배를 맡아주고 급하면 아이들도 맡아주었다.

내가 이사 오고 나서 태어난 언니의 아이가 여섯 살이 되고 언니는 건너편의 30평대 민영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아이가 임대아파트를 알 나이가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첫째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이 자녀들을 임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기 위해 꾸준히 교육청에 민원을 넣는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려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부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얼른 이곳을 탈출하라는 언니의 말에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곧 따라간다고. 그러고서 그곳에서 3년을 더 살았다. 임대료 연체로 두 번째 퇴거 명령 공고문을 받을 때까지.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종종 친구들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다녀왔다. 처음 타운하우스에 거주하는 친구 집에 다녀온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 집에서 본 풍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하에 노래방이 있더라고! 마당에서 뷔페로 음식을 차려 줬지 뭐야! 친구 방은 3층인데 방마다 에어컨이 있었어! 손님 방도 있어서 다음에 놀러 와서 자고 가래!

그 후에도 아이는 다른 곳에 사는 친구 집에 종종 다녀왔지만 더는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셋이서 함께 자고 일어나는 방을 공동으로 쓰고 있었다. 아이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아니면 집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남편은 거의 밖에서 일만 하며 지냈지만, 수입은 쉽게 나지 않았고, 내가 아이들을 돌보며 버는 수입으로는 늘 생활비가 빠듯해서 급할 때마다 빚만 늘었다. 먼저 이사한 언니에게 가끔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왔지만 난 최대한 늦게,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한 관계가 정리되었다.

나는 어리석었던 걸까
 
 자료사진
ⓒ 연합뉴스
 
어떤 이유에서든 국민임대아파트를 떠나게 되었을 때 손에 쥐어진 돈은 처음 가지고 온 돈의 딱 절반이었다. 밀린 임대료를 제하고, 은행에서 대출금을 가져가고 남은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 신도시에서 네 식구가 살 집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남편이 어디선가 돈을 구해왔다. 난 그 돈의 출처를 묻지 않았고 우리는 시세에 반값으로 나온 건너편 민영 아파트를 월세로 얻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어떻게든 30평대 아파트에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변에 타운하우스나, 전원주택까지는 아니더라도 반 친구를 불러 생일파티 정도는 할 수 있는 집.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방을 하나씩 주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다시 계획을 세웠다. 통장도 새로 만들고 일을 늘렸다. 2년 안에 전세로 이사하거나, 대출을 받아 월세로 사는 이 집을 매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월세를 세 번 납입한 직후,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집주인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 오토바이 매장을 하던 집주인은 부도가 나 감옥에 갔다고도, 어디론가 몸을 숨겨 도망갔다고도 했다. 전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몇 번 찾아왔었는데 그때마다 돈이 잠깐 막혔을 뿐이니 바로 해결해 준다던 집주인의 말을 그대로 믿었었다. 그렇게 전 재산이었던 보증금이 사라졌다.

그 후 5~6년 동안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지인의 빈집에 잠시 들어가 지내는 등, 원룸, 투룸, 아파트 월세를 전전하다 지난 2월, 방이 세 개인 24평짜리 한국토지주택공사(LH) 공공 임대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새 중고생이 된 아이들에게 방 하나씩 내어 꾸며주고 나도 내 방을 하나 차지하고 앉아 창문으로 아파트를 더 짓느라 공사판인 밖을 내다본다.

목3동으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났다. 나름 쉬지 않고 살아왔는데 여전히 임대료를 내고 있으니 상황이 예전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은 없다. 입주하자마자 두 달 동안 수돗물에서 흙탕물이 나오는 난리를 겪었고, 아직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매일 생수를 공급받아 생활하니 임대아파트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입주 초 입주민 게시판에 아파트 명칭에 붙은 NHF(국민주택기금) 삭제 서명을 촉구하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사람들이 '임대'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그런데도 현재 내 상황에서 공공 임대아파트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당장 목돈이 없어도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고 언젠가 (내가 더 노력하면) 내 아파트로 분양받을 수 있다는 희망도 있으니 말이다.

지난여름 이곳에 이사 오기 직전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이 그 집을 사라고 몇 번을 권했는데 무리해서 대출받고 싶지 않아 거절한 적이 있었다. 6개월이 지나 그 아파트 시세가  갑자기 1억 6천만 원이 올랐을 때 난 후회했다. 직장 동료가 결혼한 자녀가 파주에서 아파트를 분양받는 동시에 2억이 올랐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할 때는 내 마음이 어땠던가.

주변에 아파트값이 폭등할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져 안목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고 당장 집을 구매할 도리가 없는 무능함에 저절로 한탄이 나오지 않았나. 요즘 화제가 된 LH 투기를 검색창에서 클릭하면 관련 뉴스와 함께 'LH 직원의 투기 방법' 포스팅이 수두룩하게 올라온다. 이 투기 방법을 몰랐던 나는 어리석었던 걸까? 애초에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고 대출받아 집을 샀더라면 내 삶은 많이 바뀌었을까?

지금 나는 안온하다

가끔 목3동 시장터 옆 신혼집과 처음 파주에 와서 살던 국민임대아파트가 그립다. 직전의 집 주소는 벌써 헷갈리는데 그때의 번지수와 동호수는 아직도 외우고 있다. 나를 알아주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집이 없어도 만족하던 시절이었다.

소란스러운 시장터에는 어리고 순진한 부부가 팔짱을 꼭 끼고 어리숙하게 장을 보던 장면이 가득하고 노을이 비추던 기다란 복도에는 마음이 맞는 이웃과 나누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복작거린다. 그곳을 떠난 이후, 내가 집이 없다는 사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무너진 가정 경제에 남편과는 헤어졌고, 잦은 이사에 이웃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근근이 아이들을 지켜내려고 애쓴 하루하루엔, 어떤 미래도 계획도 없었다. 앞으로도 난 집을 이용하여 돈을 벌지 못할 것 같다. 단지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식사하고 잠잘 수 있는 이곳에서, 비록 생수를 공급받아 쓸지언정 오래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은 반려견과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러 나간다. 산책로를 찾아다니고, 주변 가게를 들러보고 오가며 이웃과 얼굴도장을 찍는다. 현관을 청소하고 새 유리가 얼룩지는 게 싫어 하루에 몇 번씩 유리창과 거울을 닦는다. 이런 순간순간 가슴속에서 기쁨이 울렁인다. 그렇다, 지금 나는 안온하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으므로. 그러니 당분간은 집을 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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