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이 사라진 아버지의 시신.. 기나긴 여정의 시작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아버지 정순민이 학살된 검단면 불로리 야산 현장의 정금모 |
ⓒ 박만순 |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대곡리 설원마을과 김포면 감정리는 이웃해 있는 마을로, 하동정씨 집성촌이다. 13대째 살아온 이 마을들에 불행의 먹구름이 낀 때는 1950년 가을이었다.
당시 김포군에는 인민군에 협조한 이른바 '부역혐의자'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인민군이 물러나고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한 직후였다. 검거는 경찰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치안대가 주도했다. 특히나 대곡리와 감정리 하동정씨 집성촌에 검거 선풍이 분 데는 정씨 일가였던 정지태(가명)가 검단면 치안대장에게 '부역자' 제보를 한 것이 시초였다.
하동정씨 집성촌 싹쓸이 당해
정지태의 부역자 제보에는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밀고의 성격이 강했다. 정씨 집안에서는 토지 분쟁으로 집안 간 갈등이 있었는데 정지태가 이를 이용해 해코지를 한 것이다. 상당수 주민들이 피신했지만 정지태와 치안대의 집요한 검거로 모두 잡히고 말았다.
먼저 노인과 여성들이 지서에 연행됐는데 이들은 김포경찰서 이송 후 여우재, 독자골, 김포초등학교 뒷산에서 학살됐다. 다음엔 대곡리 마을의 성인 남성들이 검단지서에 연행됐다. 검단면 대곡리 정순민(1922년생)도 연행되었는데, 검단지서에는 고문기술자 권〇〇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단면 오류리의 권〇〇은 정순민을 포함 구금된 10여 명의 사람들에게 몽둥이 찜질부터 시작해 각종 고문을 가했다.
지서에 끌려온 이 중에는 정영모도 있었는데 그는 죽지 않을 만큼 맞아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탓에 정영모는 학살지로 끌려가지 않았다. 또 정환기(당시 17세)는 '집안 종손'이라는 이유로 살려 주었다. 나머지는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갔다. 정순민은 1950년 10월 9일 검단면 불로리 야산에서 학살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여우재, 독자골 등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하동정씨 54명이 죽임을 당했다. 두 마을의 정씨가 20여 호였던 점을 감안하면, 정씨 집안 성인은 모두 학살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리 없는 시신
야산에서 학살 당할 때 정순민은 정영모의 잠바를 입고 있었다. 지서에서 고문을 당할 때 정영모가 벗어준 것이다. 그 잠바 덕분에 정순민의 시신은 수습될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알아보자.
1950년 10월 아들 정순민이 죽었다는 소식에 어머니 여원순은 집안 사람들과 여우재, 독자골 등지를 헤메고 다녔다.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고 팔, 다리를 젖히면 몸통에서 빠지기 일쑤였다. 유족들은 다른 이의 시신을 훼손할까 가족의 시신을 찾는 데 조심스러워했다.
여원순이 불로리 야산에서 아들 정순민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영모의 잠바 때문이었다. "작은할머니, 순민이 당숙이 맞아요"라는 정영모의 고함에 여원순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을 벌리고 죽은 아들의 얼굴은 문드러져 눈코입을 분간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정순민의 손에 묶인 삐삐선을 끊고 시신을 수습한 후 선산에 매장했다.
지난 2018년 정순민의 아들 정금모(71,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이동)는 어머니 이응희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와 합장하기로 했다. 이장을 위해 아버지 정순민의 묘를 팠는데 기겁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두개골이 없었던 것이다. 1950년 가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잘린 목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것이다. 두개골이 없는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면서 아들 정금모는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표에 따르면 6.25 당시 한 살 아기부터 57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학살되었고, 가족 구성원 상당수가 희생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역과는 상관없이 집단적인 학살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후 대곡리와 감정리는 '과부촌'이라 불리게 된다. 치안대원들은 피해자 집에 가서 소를 빼앗고, 솥단지를 가져가기도 했다.
정평모 집안의 파멸
김포면 감정리의 정경자 집안은 6.25 때 파멸되었다. 연희전문 출신 친척 정〇〇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에 물든 정평모(1916년생)는 수복 직전 아들 정관유(1936년생)을 데리고 월북했다. 정평모의 남동생 두 명과 여동생 정성희(1937년생)도 따라 월북했다. 평모의 동생 정윤모(1918년생)는 아들 정환규(1938년생)를 데리고 갔으며, 정범모(1927년생)은 단신으로 월북했다.
이후 1962년 정범모가 정〇〇와 남파되어 고향에 왔다. 정〇〇는 동생 정학모의 집으로 가 형제 상봉을 했다. 당시 정범모는 마을 뒷동산에 있었다. 정학모는 형에게 자수를 권했지만 거부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정〇〇는 검거되었고, 정범모는 도망가다가 걸포교 아래에서 사살되었다. 정〇〇는 7년 수감 후에 석방됐다.
월북자를 빼고 남은 정경자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학살되었다. 정경자의 할아버지·할머니, 백모가 죽임을 당했다. 또 정평모의 부인 한말녀와 자식 셋도 죽임을 면하지 못했다. 정경자 집안의 6.25 당시 행적을 표로 보면 아래와 같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밝히고 싶어
정순민의 아들 정금모는 검단초등학교, 김포중학교, 인천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대림대학교 토목과를 나와 공무원 생활을 잠시 했다. 이후 한강농지개량조합을 거쳐 건설업계에 몸을 담았다. 젊었을 적에는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어 아버지의 존재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특히 2018년 아버지의 시신에 두개골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로는 너무나 가슴이 저려왔다.
결국 정금모는 아버지 정순민이 왜,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검단면의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같은 집안(하동정씨)인데도 그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김포면 감정리의 일부 피해자는 진실규명 결정을 받기도 했다.
정금모는 검단면 대곡리와 김포면 감정리의 피해자 진실규명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현재 그는 김포유족회 미신고자 상임대표와 '한국전쟁전후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인천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두 개 마을의 피해자 54명에 대한 명단을 정리하고, 유가족들을 만나 '진실규명신청서' 작성을 돕고 있다.
한국 현대사 공부도 하고 있다. 아버지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를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정금모는 3년 동안 미친 듯이 책과 자료를 섭렵했다. 그래서 그가 얻은 결론은 인권의식의 부재와 민주주의의 실종이 엄청난 국가폭력을 양산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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