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자체 해결하라" 뒷짐..상처뿐인 '아파트 택배' 갈등
아파트 입주민과 택배노동자의 ‘배송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18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신도시에서 시작된 택배 대란은 2021년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서 또다시 반복됐다. 양측의 입장은 3년 전과 다를 바 없다. 입주민은 “안전을 위해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라”고 요구하고 택배노동자들은 “일방적인 갑질”이라고 맞선다. 정부와 택배사가 손 놓은 사이 갈등은 더욱 깊어지는 양상이다.
택배 대란은 주로 ‘지상공원형’ 아파트에서 벌어진다. 지상에 차량이 다닐 수 없도록 공원으로 조성한 아파트인데, 대형 택배차량이 오가면 안전사고 위험이 커지고 보도블럭이 파손된다는 게 입주민들의 주장이다.
반면 택배노동자들은 지하주차장 층고가 낮아 대형 택배차량이 진입할 수 없고, 사비를 들여 저상 차량을 개조하기에는 부담이 크다고 반발한다. 화물칸 높이가 낮으면 물건을 꺼낼 때 신체적 고통이 커지는 점도 문제다. 아파트 입구에서 택배물을 손수레에 옮겨서 이동하는 것 역시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과로를 유발할 수 있다고 택배노동자들은 말한다.
3년 전 정부의 대응은 어땠을까. 2018년 4월 다산 신도시 택배 대란 당시 국토교통부는 중재에 나섰다가 역풍을 맞았다. 정부 예산을 투입한 실버택배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일부 아파트 주민의 편의를 위해 세금을 쓴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입주민들은 실버택배 사업 비용을 부담하는 재협상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의가 실패로 끝나자 정부는 “앞으로 아파트 단지 내 택배차량 통행을 거부하는 경우 자체적으로 해결방안을 찾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정리했다”고 발표했다. 더이상 아파트 택배 갈등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이 사태를 계기로 지하주차장 층고를 택배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2.7m로 상향하도록 개정했다. 이에 따라 2019년 1월 이후 사업계획 승인된 지상공원형 아파트에선 층고 2.7m가 적용됐다.
문제는 지하주차장 층고를 기존의 2.3m로 설계한 지상공원형 아파트 단지들이 속속 준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장기적인 해법은 마련했을지 몰라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에 따르면 현재까지 택배 지상 출입이 금지된 아파트는 179개로 집계됐다. 이 아파트들의 택배기사 대부분은 손수레로 배송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최근 문제가 된 고덕동 A아파트 인근 B아파트 역시 지상도로에 택배차량 출입을 제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 아파트는 5월 한 달을 계도기간으로 정했다고 한다.
고덕동 아파트의 택배 갈등은 지난 14일 택배노조가 아파트 입구까지만 배송하겠다고 통보한 뒤 정점에 치달았다. 5000세대에 육박하는 대규모 단지 입구에 택배기사들이 쌓아놓은 800여개의 택배들이 가득찼다. 이후 몇몇 입주민이 택배기사에게 항의성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 택배노조는 16일 다시 문앞 배송을 실시하겠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택배노조가 공개한 문자메시지에는 ‘본사에 민원을 넣겠다’ ‘택배가 분실되면 책임질 건가’ ‘(택배) 부피가 커서 (언론에) 이용하시는 건가’ 등의 내용이 담겼다. 택배노조 측은 “택배노동자들에게 수많은 항의 전화와 문자들이 쏟아지고 있다”며 “이로 인해 참여한 택배노동자들 중에는 일을 그만둘 생각까지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아파트 입주민 사이에서도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입주민은 “입주민대표회의에서 1년 넘게 택배업체와 논의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날 ‘갑질 아파트’로 낙인찍혀 당황스럽다”며 “아파트 정보를 공유하던 오픈채팅방에서도 주민들을 향한 비난 글이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입주민도 “택배기사분들이 눈치를 보고 제대로 업무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안타깝다”라며 “대화를 통해 조속히 해결되길 바란다”고 했다.
택배노조 측은 몇 차례나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화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입주자대표회의는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택배노조 측은 ▲아파트 내 안전속도 준수 ▲후면카메라 의무 설치 ▲안전요원 배치 등의 대안을 제시하며 지상 출입을 허용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전동차 도입 등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면 적극 응하겠다는 입장이다.
택배노조 측은 이번 사태를 방관하는 정부와 택배사의 문제도 크다고 지적했다. 김태완 전국택배노조 수석부위원장은 “택배기사들은 대리점이나 택배사에 고용된 사람들일뿐, 아무런 힘이 없다”며 “사비를 들여 저상 탑차를 개조해야 하는 상황은 협의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수석부위원장은 이어 “차량을 이용해 건물에 들어가서 배송하는 택배 시스템 자체를 부정한다면 당연히 택배사가 나서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다산 신도시 사태에서 중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택배사와 정부 모두 뒷짐을 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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