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놀라게 했던 '비누 조각가', 왜 브랜드를 버렸나
신미경(54·사진) 작가에게는 ‘비누 조각가’라는 별칭이 붙는다. 눈에 익은 서양의 비너스 조각상, 혹은 중국 명·청대의 화려한 분채 도자기인데 가까이 가서 보면 비누 냄새가 폴폴 나는 ‘모조’라 반전이 일어나는 이 연작에 먼저 환호한 것은 유럽인이었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그가 영국 유학 중이던 1996년에 탄생한 작품들이다. 재미 삼아 입시 미술로 갈고닦은 실력으로 서양의 고전 여인 조각상을 똑같이 모사한 데 유럽인들이 탄복하는 걸 보고 힌트를 얻었다.
신미경이 이른바 여러 변주를 하며 지속한 입체 비누 조각을 내던졌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복합문화공간 씨알콜렉티브에서 하는 ‘추상에 대하여’전(5월 29일까지)은 그 변신을 선언하는 장 같다. 전시장에 나온 작품은 하나같이 평면이기 때문이다. 얼핏 회화로도 보인다. 잭슨 폴록의 물감의 흩뿌림, 혹은 서체적인 추상을 연상시키는 신작 50여 점이 내걸렸다. 입체 형태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하, 그래도 100% 조각적인 행위에요. 조각가로서 접근한 작품들이지요. 하지만 회화 형식으로 선보이고 싶었어요. 여태까지 하지 않은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13일 개막식에서 만난 작가는 새로운 시도에 즐거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변신이라기보다는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지난해 런던에선 비누가 아닌 세라믹(도자기)으로 한 작업을 선보였고,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부대 전시에선 유리를 재료로 유리장인과 협업하는 기획전에도 참여하는 등 늘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비누 조각 전시도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 작가는 이번 작품들을 ‘회화의 형태를 띤 납작한 조각’이라 명명했다. 버려진 고무판이나 스티로폼, 유리판 위에 액체 상태의 제스모나이트(일종의 무독성 레진)를 부어 굳혀서 작품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고무판의 결이나 마모된 부분, 스티로폼의 표면 요철을 판화처럼 담아낸다. 레진에 안료나 돌가루, 금박, 은박을 섞어 예기치 않은 추상 회화의 효과까지 낸다. 그러니 신작은 판화와 회화, 부조의 삼박자 속성을 다 가진 셈이다.
그런데 왜 추상이어야 할까. 작가는 “제 이전 작업은 비너스 조각상 등 기존에 존재했던 미술 형식을 연상시키는 결과로 나타났어요. 이번 신작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걸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추상 회화는 다 알잖아요. 신작에서도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어요.”
25년간 해오던 작업을 탈피하는 건 쉽지 않았을 터다. 변신에 대한 강박 같은 게 느껴졌다. “네, 맞아요. 입체 작품을 하는 작가 이미지로 고착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그래서 조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걸 하고 싶었어요. 관성에서 벗어나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했어요.”
영국의 미술계 풍토도 작용한 듯했다. 그는 1995년 런던 슬레이드 스쿨 조소과 대학원에 유학한 이래 런던에 근거를 두고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다. 현재 왕립조각가협회 고문(펠로)으로 활동할 만큼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런던에서는 스펙트럼이 넓은 게 중요하다. 중년 작가는 변신해야 성공할 수 있는 구조다. 30대에 한 아이템으로 성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계속하면 발전이라기보다 반복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자신의 브랜드를 벗어나기 힘들다. 미술관과 화랑들이 히트곡만 원하니까 신곡을 발표할 기회가 잘 안 주어진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국 미술계는 평생 ‘물방울 그림’만 그리는 작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뜻으로 이해가 됐다. 4년 전부터 새로운 작업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고, 마침 씨알콜렉티브 오세원 대표가 맘껏 해보라며 응원해줘 이번 전시가 성사됐다. 오 대표는 “미술관은 검증된 걸 보여주고, 갤러리는 팔리는 걸 보여준다. 새로운 걸 실험하고자 하는 작가에겐 공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씨알콜렉티브는 실험하고 도전하는 작가에게 열린 공간”이라고 거들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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