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남편, 아내는 왜 역사학자가 되었을까
[백창민, 이혜숙 기자]
- 1편 항일전쟁 한복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던 여자에서 이어집니다.
▲ 김영숙 함경북도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숙은 중국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다. 해방 직전 그녀는 무정의 아내가 된다. 조선독립동맹 조직과장이었던 김영숙은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 도서관도 운영했다. 김영숙을 촬영한 흔치 않은 사진이다. |
ⓒ 채륜출판사 |
1945년 일제가 패전을 선언하자 무정은 귀국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무정은 김영숙과 결혼하기 위해 텅치와 이혼했다. 텅치와 두 아이가 있었음에도 무정은 김영숙을 선택했다.
텅치는 무정과 함께하기 위해 압록강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그녀가 조선 국경까지 따라오자, 무정은 선을 긋고 넘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무정은 텅치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텅치에게 무정은 말 그대로 '무정'(無情)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정치인으로 활동을 앞둔 무정에게 중국인 아내는 부담이었을 수 있다. 무정의 선택이 '사랑' 때문인지, '정략'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둘 다 고려했을 수도 있다. 텅치는 훗날 중국공산당 허난성 위원회 비서장을 지냈다고 한다. 무정과 텅치 사이에 태어난 두 아이는 아버지 성이 아닌 어머니 성으로 자랐다. 딸은 텅옌리(腾延麗), 아들은 텅옌젠(腾延震)이다.
무정의 이혼은 미묘한 파장을 낳았다. 무정에게 텅치를 소개한 사람은 펑더화이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중국인 아내와 이혼한 무정에게 섭섭함을 가졌을 거라고 분석했다.
해방을 전후해서 김영숙은 무정과 결혼했다. 1945년 12월 13일 김영숙은 무정을 비롯한 연안파 핵심 인사와 함께 평양으로 귀환했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이 나뉘긴 했지만 연안파가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연안파와 함께, 조선의용군 상당수는 해방 후 38선 이북을 선택했다. 그들이 선택한 땅이 어디든 조선의용군의 항일 투쟁 역시 우리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페이지로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만주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국민당 군대와 전투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이홍광 지대'라 불린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단으로, 제3지대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보병 제164사단으로, 제5지대는 동북한일연군 교도려와 합치며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단이 되었다. 당시 동북에서 활동한 조선인 부대는 6만 명에 이르렀다.
▲ 펑더화이와 김일성 1955년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사진 오른쪽)과 건배를 하는 펑더화이(사진 왼쪽). 무정과 절친했던 펑더화이는 한국전쟁 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참전했다. 무정에게 텅치를 소개한 사람도 펑더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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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조선인민군 제6, 5, 12사단으로 각각 바뀌었다. 이들은 북한 병력의 1/3을 차지하면서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이중 6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였다. 6사단의 기동과 전과가 미국 웨스트포인트 전쟁사 연구에서 자주 인용될 정도다.
입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6일 무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5년 9월 11일 구성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도 무정은 서열 13위로 이름을 올렸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당 당시 무정은 31명의 주석단 중 서열 13위였다.
무정과 함께 귀국한 김영숙이 당이나 내각, 최고인민회의에서 활동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허정숙이 활발하게 활동했을 뿐 옌안에서 싸운 여성들이 북한에서 어떤 직책으로 활동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김영숙은 정치 일선에 뛰어든 남편 무정과 행보를 같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정은 한때 '황해도의 아버지'로 불리며 해방 정국에서 명성을 떨치지만, 김일성과 만주파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정치가 아닌 군으로 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무정은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지만 정치력까지 겸비하진 않았던 걸로 보인다. 안문석 교수의 평가처럼, 무정은 '한국만의 공산주의'(communism for Korea only)를 꿈꿨지만, 자신의 꿈을 펼칠 공간은 마련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출범식 때 무정은 포병 부사령관이었다. 인민군 총사령관은 최용건, 부사령관 겸 문화부사령관은 김일로, 모두 만주파였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남한 공격 계획을 작성할 때도 무정을 배제했다. 김일성은 유엔군 반격으로 압록강 일대까지 밀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무정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 김일성과 북조선 민전 간부 1946년 7월 22일 조직된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청사 앞에 선 중앙위원 간부 일동이다. 앞줄 맨 왼쪽은 최용건, 세 번째부터 김책, 김일성, 김달현, 허정숙, 리강국 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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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김일성은 무정을 숙청하는 계기로 전쟁을 활용했다. 1950년 11월 24일 조선인민군 전체 군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무정은 평양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1950년 12월 2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평양방어사령관'이었던 무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무정은 전격 연행되어 감금당했다.
한국전쟁을 통해 정치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최대 수혜자는 김일성이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미제 간첩 혐의로 박헌영을 체포하고 1956년 무렵 처형했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은 김일성이었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그는 자신의 책임을 정적에게 돌리며 권력 강화 기회로 삼았다. 전쟁이 터지자 국민을 내팽개치고 가장 먼저 달아난 이승만도 그랬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과 북 최고 지도자의 모습은 또 다른 면에서 닮았다.
무정이 숙청되자 중국은 북한 당국에 그의 인도를 요청했다. 중국 혁명을 함께 한 동지가 어려움에 처하자, 그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던 걸로 보인다. 무정은 창춘(長春)으로 넘어가 루마니아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지병인 위장병 치료를 받았다. 중국 혁명에 큰 공헌을 한 무정은 중국에서 계속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죽어도 조국 땅에서 죽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온 무정은 1951년 8월 9일 평양 인민군 39호 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에서 무정은 숨을 거뒀다. 1944년 3월 25일 정철수를 비롯한 새로운 조선독립동맹 맹원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무정은 이런 연설을 했다.
"진정한 혁명가라면 3대 각오, 즉 얼어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적의 총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 김영숙이 유학한 베이징대학 청나라 때인 1898년에 세웠다. 중국 최고 국립대학이다. 설립 당시 교명은 경사대학당이다. 1916년 이후 대학 개혁을 거치며 예과 3년, 본과 3년의 학제를 확립했다. 김영숙은 무정이 숙청된 후 베이징대학에서 역사를 연구했다. 김영숙이 베이징대학이 아닌 칭화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설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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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항일 투쟁에 나선 무정이지만 해방 조국에 돌아와 '동지'로부터 숙청당할 각오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숙청 후 미칠 듯한 분노와 억울함에 사로잡힌 무정이 자신의 똥을 집어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내인 김영숙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것이다.
무정이 북한에서 정권을 잡았다면 김영숙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 살았을 것이다. 김일성의 아내인 김정숙과 김성애가 차지한 지위는 김영숙의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때부터 1951년 무정의 죽음까지 6년은 김영숙에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무정이 세상을 떠난 후 김영숙은 '역사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김영숙은 베이징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항일 투쟁 과정에서 그녀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의 이런 경력이 중국 유학생 선발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남편 무정에 이어, 중국공산당원이었던 김영숙까지 숙청하는 건 김일성 집단에도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김영숙은 베이징대학에서 역사를 연구했다. 그녀의 논문이 1964년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출간한 <김옥균>에 실려 있다. 북한은 한국 근대사 4대 인걸로 김옥균, 신채호, 박은식, 주시경을 꼽는다. <개화파 정강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김영숙은 자신을 '력사학 학사'로 소개하고 있다. 북한의 '학사'는 남한으로 치면 '석사'다.
논문에서 그녀는 개화파 정강이 갖는 '자주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해방 직후 북한으로 귀국한 무정은 소련과 소련에 기댄 김일성 집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연안파로 빨치산 '외팔이 부대장'으로 유명한 최태환이 무정에게 직접 들었다는 말이다.
"나는 평생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다. 만약 조국의 독립을 침해하고 간섭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말이다."
▲ 평양 애국열사릉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립묘지다. 1986년 9월 17일 33만 m2 규모로 문을 열었다. 평양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있어서 신미리 애국열사릉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1994년 복권된 무정은 애국열사릉으로 이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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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여러 지방을 돌며 연설하는 과정에서 무정은 이와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김영숙이 높이 평가한 개화파의 '자주성'을 북한 학계에서는 주체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외세에 기대어 정권을 수립한 김일성 집단에 대한 비판과 연안파 동지들에 대한 연민을 논문에 담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녀가 왜 역사학자의 길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남편 무정을 비롯하여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운 동지들이 '반당주의자'와 '종파주의자'로 하나둘 숙청되는 역진(逆進)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개화파 정강에 대하여> 논문을 쓴 이후 김영숙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숙청되어 사라진 무정은 1994년 '복권'된다. 무정을 복권한 건 그를 숙청했던 김일성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4월 김일성은 만수대 조선혁명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 전시 인물 중 무정이 없는 걸 확인한 김일성은 '그가 큰 공은 없지만 그렇다고 종파주의자도 아니었다'라면서 무정의 복권을 지시했다고 한다.
복권 후 무정은 평양 애국열사릉으로 이장했다. 김영숙이 1994년까지 생존해서 무정의 복권을 지켜봤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가 무정보다 10살 어렸다 하더라도 80세 전후 고령이었을 것이다.
김영숙은 '그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무정의 아내'가 아닌 '항일 독립운동가'와 '역사학자'로서 살았다. 그녀의 삶을 무정이라는 인물에 기대어 설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 남성도 힘겨웠던 항일 무장투쟁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운, 그녀의 온전한 삶을 언젠가 제대로 그려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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