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지나도 선명한 아픔"..붉게 녹슨 세월호 선체 마주선 유가족들

진창일 2021. 4. 1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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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딸 이름표와 함께 세월호 찾은 어머니
"처음 봤을 땐 걸음도 못 걸었는데" 기억 되짚어


“올해도 우리 딸 이름표랑 함께 왔죠.”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은 16일 전남 목포신항 세월호 선체 앞. 고(故) 정다혜양(당시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의 어머니 김인숙씨가 녹슨 선체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둘러맨 가방에는 여전히 다혜양의 사진이 담긴 이름표가 묶여 있었다.


딸 이름표와 함께 찾은 세월호

16일 세월호 참사 7주기 추모식이 열린 전남 목포신항 세월호 선체 곁으로 유가족들이 걸어가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씨는 세월호를 찾을 때면 꼭 딸의 이름표를 챙긴다. 지난해 이곳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6주기 추모식도 딸의 이름표와 함께 했다. 당시 유가족들은 '안산에서 열리는 기념식보다 사고해역과 세월호 선체를 찾고 싶다'며 세월호 선체 앞에서 별도 추모식을 가졌다.

그는 올해 다시 찾은 세월호를 올려다보며 “처음 세월호에 왔을 때는 걸음조차 못 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17년 세월호 선체가 인양된 뒤 딸이 머물렀던 선미쪽 여학생 객실에 들어섰을 때가 기억난 것이다.

김씨는 “우리 딸이 있던 객실에 들어갔던 기억이 선명한데 한 걸음만 나오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복도 옆이었다”며 “객실에서 기다리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면 우리 딸도 살았을 텐데…”라고 했다.


7년 지났어도 선명한 아픔

16일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추모식이 열린 전남 목포신항 세월호 선체 앞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다혜양은 세월호 참사 후 19일만인 2014년 5월 4일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우리 아이가 바다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잠수사들이 있는 바지선에 따라갔다”며 “우리 아이 한 번만 찾아달라는 애타는 심정으로 바지선에서 찬 밥 먹는 잠수사들에게 찌개와 따뜻한 밥 해주며 기다린 지 딱 3일 만에 다혜를 찾았다”고 했다.

김씨와 유가족들은 붉은빛으로 녹슨 선체 앞을 지나 바다 쪽을 마주한 뒤편으로 걸어나갔다. 내부 진입과정에서 뚫렸던 선체 곳곳은 하얀 철판으로 덧대져 있었다. 김씨는 아직 찾지 못한 다혜양의 캐리어 이야기를 꺼냈다.

김씨는 “뉴스에서 제일 먼저 본 것이 우리 딸 캐리어인데 그것 하나만 못 찾았다”며 “휴대전화나 가방 등 다른 것은 다 찾았는데 수학여행 떠나기 전 이것저것 챙겨준 캐리어만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참사 해역 앞에 서자 떠오른 그 날

세월호 참사 7주기인 16일 오전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유가족들이 사고 지점을 알리는 부표를 바라보며 오열하고 있다. 뉴스1


세월호 유가족들은 선체 앞 추모식에 앞서 이날 오전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인근 세월호 참사 해역을 찾아 선상 추모식을 열었다.

고(故) 이호진군 아버지이자 0416단원고가족협의회 대변인인 이용기씨는 추모사를 통해 “오늘이 특별한 게, 우리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던 요일도 겹치고 날씨도 사고 난 날과 비슷하다"며 "목이 메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6일 전남 목포신항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유가족들이 묵념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유가족들은 진도와 목포에서 추모식을 마친 뒤 안산으로 돌아갔다. 내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김씨는 “내년에도 우리 딸 이름표와 함께 와야죠”라며 “추모식이 열리는 동안에는 잊지 않고 언제든 힘닿는 대로 꼭 오겠다”고 했다.

목포=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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