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게 생선을? 이상한 보험업법 개정안
[조선혜 기자]
▲ 통상 금융 관련 민원은 각 금융회사나 금융위원회 산하 특수법인인 금융감독원에서 처리한다. |
ⓒ pixabay |
'소비자 권익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함.'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9일 대표 발의에 나선 보험업법 개정안 제안이유서에 담긴 문구다.
그런데 이 법안을 두고 시민사회단체와 전문가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보험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이익단체인 보험협회에서 민원을 처리하고, 보험사와 소비자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라는 것이다.
통상 금융 관련 민원은 각 금융회사나 금융위원회 산하 특수법인인 금융감독원에서 처리한다. 다급한 마음에 먼저 금감원에 민원을 접수하는 소비자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금융사 쪽 대처가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소비자들이 소송 전 마지막 구제처로 금감원을 찾게 된다. 금감원 분쟁조정은 금융사와 소비자가 조정 결정 내용을 수용하면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금융 민원 가운데 절반 이상은 보험 관련 민원이다. 2019년 기준 8만2000여 건의 민원 중 62.3%(약 5만1000건)가 보험 민원이었다. 지난 2015년부터 2018년까지도 이 비율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됐다.
김한정 의원실은 지난 12일 보도자료를 내고 "민원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민원이 금감원에 집중되고 있지만, 이를 담당하는 인력은 제한적이어서 민원 및 분쟁의 처리 기간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며 "이에 보험협회에 보험 민원 처리 및 보험 분쟁의 자율조정 업무와 기타 상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도록 했다"고 발의 이유를 밝혔다.
이어 "현재 자본시장법에 따른 한국금융투자협회(금투협)와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른 여신전문금융업협회(여신협)도 분쟁의 자율조정 및 민원의 상담·처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개정안에 의해) 금융소비자의 불만과 불편이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소비자 두 번 죽이는 꼴"
소비자단체들은 강하게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은 "소비자 잘못으로 발생한 일은 민원이 될 수 없다"며 "보험사 잘못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본 경우 민원을 제기하는데, 지금까지 금감원에서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금감원에서도 민원 10건 중 7~8건은 수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그런데 보험사 이익단체인 협회에 분쟁조정 업무를 이관하면 온전히 처리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금융소비자연맹도 15일 "해당 개정안은 보험상품의 불완전판매 등을 없애 보험 민원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감원이 이익단체에 민원 처리를 고스란히 넘겨 해결하려는 황당한 해결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보험업법에 정통한 한 전문가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절대로 허용해선 안 되는 법안"이라며 "그렇지 않아도 금융분쟁조정제도가 (금융회사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지적이 많은데, 이익단체에 조정 권한을 넘기는 것은 소비자를 두 번 죽이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보험사로부터 보험금 지급 거절 등의 답변을 받은 소비자가 이후 보험협회를 찾더라도 공정한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다.
금투협 등에도 조정 권한이 부여돼있어 문제가 없다는 의원실 쪽 주장과 관련해선 "보험 관련 민원이 다발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적 기구인 금감원이 계속 관리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또 현재까지 금투협이나 여신협 쪽 분쟁조정제도의 실효성 있는 결과를 듣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 2019년 기준 8만2000여 건의 민원 중 62.3%(약 5만1000건)가 보험 민원이었다. |
ⓒ 김한정의원실 |
보험 민원을 줄이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을까? 오세헌 국장은 "인력 부족 문제는 금감원이 자체적으로 풀어야 한다"며 "생명보험의 경우 판매 당시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손해보험의 경우 보험금을 지급할 당시와 관련한 분쟁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금감원 데이터를 활용하면 보험사별·상품별 민원과 그에 대한 기존 답변을 추릴 수 있다"며 "그런데 금감원은 그런 시스템을 마련할 의지도, 역량도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현장에서 불완전판매가 발생하지 않도록 처벌 수위를 높여야 민원이 줄어들 수 있다"며 "지난 2016년 사전 규제에서 사후 규제로 금융감독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민원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보험 민원 근절을 위해 금융위와 금감원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희석 부산대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금융소비자보호원과 같은) 독립기구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제언했다. 다른 전문가도 "네덜란드·미국·영국의 경우 2000년 이후 금융분쟁조정 관련 독립기구를 신설했는데, 우리나라도 별도 기구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만약 법안대로 보험협회에 분쟁조정 권한을 부여하더라도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 교수는 "보험협회가 분쟁조정 기능과 관련해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에 대해선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며 "예를 들어, 금감원이 협회 내 분쟁조정위원회 구성이나 조정 기준 등에 대해 관여할 수 있다면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만약 그런 장치 없이 단순히 협회에 분쟁조정 권한만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협회서 분쟁조정 맡더라도 당국 개입 필요
오세헌 국장은 "일본의 경우 협회 내 보험상담소라는 별도 조직을 두고 있는데, 해당 상담소는 협회의 이해와 전혀 관련 없는 변호사 등으로 구성돼있다"며 "이들은 금융당국인 금융청에서 선임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이곳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보험사와 민원인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돼있다"며 "설령 보험협회에 분쟁조정 역할을 맡기더라도 이런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이번 개정안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대표 발의에 나선 의원실 쪽은 법안 처리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김한정 의원실 관계자는 "보험협회를 보험사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운영자금을 보험사들의 회비로 충당하고 있지만, 협회는 관련 법에 의해 설립된 조직이고, 법에서 지정된 업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 관련 민원과 분쟁을 모두 협회로 이관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단순 질의·민원에 대해서만 협회에서 처리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와 관련한 세부 사항에 대해 현재 금감원과 협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며 "이는 시행령이나 규칙 등에 포함될 수 있는데, 다른 협회와 소비자단체 쪽 의견을 반영할 계획"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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